익명신화(匿名神話)

  

  

  

 

익명신화(匿名神話)

나의 작업에 대한 생각은 지금까지 추구해왔던 [사색의 여행]에서 이제 [익명신화]라는 좀 더 구체적인 사유방식을 택하고 있다. 익명의 신화는 그간 내 뇌리 속에서 정리되지 않고 스쳐지나갔던 막연한 파편같은 영상이랄까, 그러한 감성적인 것들을 신화적인 컨셉으로 풀어가고자 한다.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신화는 고대인들이 남긴 이야기들로 모두 허황된 거짓말이라거나 사고의 미성숙에서 야기된 유아적 세계관을 담고 있는 것 만은 아니다. 고대인들 역시 오늘날 우리가 처한 문제와 비슷한 여러 문제에 열중하고 있었고, 신화는 그런 문제를 해석하려고 했던 시도였다.

신화 속에서 우리가 접하게 되는 많은 문제들, 인간의 본성, 운명, 죽음이라는 문제에 대한 고대인들의 메시지는 사고 습관이나 경험 방식에 놓인 큰 차이를 뛰어넘고 있다. 따라서 신화는 여전히 의미심장하게 현재에 와 닿아 있는 것이다. 현대인은 신화의 세계로부터 점점 멀어질수록 로고스와 만나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꿈은 신화가 존재하는 한 사라지지 않는다. 신화는 역사적인 꿈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기능이기 때문이다.

인도의 철학자 아난다는 '절대적인 진리가 언어로 표현될 수 있다면, 그것에 가장 가깝게 접근해 있는 것이 신화'라고 하였다.

종교적 삶의 수수께끼나, 세속적인 삶의 수수께끼가 각기 나름대로 복잡한 역사적 운명을 지니고 있겠지만, 나는 그 수수께끼들이 구체적 신화를 통해서만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형식적 논리나 합리주의적 논리의 원칙에 바탕을 둔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사유를 통해서는 종교적 삶을 인식할 수 없다. 종교적 삶은 그것을 현실 속에 살아 움직이는 개인들의 결정적인 운명으로 이해하는, 구체적인 신화를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신화 속에는 태고의 사유 습관이 살아 남아 있다. 신화는 사물들에 대한 관찰 기록이지만,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극적인 상상력에 의지해 그 사물들이 암시하는 온갖 요소를 가미한 기록이다. 신화는 의식적으로 만들어낸 문학이 아니며, 그렇다고 확실한 근거를 지닌 과학도 아니다. 그러나 신화는 문학과 과학이 공통으로 지니고 있는 뿌리이자 문학과 과학의 원료이다.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들에 관한 긍정적인 진술은 신화, 즉 시가(詩歌)라는 암시 형태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것, 범주화 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전통의 영역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신화는 우주와 인생의 내밀한 의미를 표현하는 상징적 이야기이다. 신화는 삶의 토대이기 때문에 시간을 초월하여 언제나 타당성을 갖는 도식이자 나무랄 데 없는 공식이다. 삶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신화라는 공식이 무의식을 통해 신화의 특성들을 재생해 낼 때 우리의 삶은 자연스럽게 그 공식 속으로 흘러 들어간다. 우리가 얻는 것은 눈에 보이는 현상 속에 내포되어 있는 한 차원 높은 진리에 대한 통찰력이다. 우리는 영원한 것, 언제나 존재하는 확실한 것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삶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도식을 꿰뚫어보게 되는 것이다. 그 도식에 따라 임의의 개개인은 자신의 삶이 공식이자 반복일 뿐이며 자신의 행로는 자기 이전에 이미 그 길을 걸어갔던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 예정해 놓은 것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자기 자신이 공간과 시간 속에 존재하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소박한 믿음 속에서 살아간다. 신화는 본질상 詩라고 할 수 있다. 신화의 구성에서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들은 실제로 기교에 의해 형상화된다. 이것저것이 서로 연결되고 변형되며, 새롭게 관련지어지기도 하고 달리 해석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관련 짓기와 변형시키기야말로 신화 특유의 공정이자 수단이며 신화의 비밀스런 생명이다.

또한 우리가 언어를 사유의 외적 형태이자 표현이라고 인식한다면, 신화는 필연적이고 당연한 것이며, 본질적으로 언어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사실 신화는 언어가 사유에 드리우는 어두운 그림자인데, 언어가 사유와 완전히 일치하기 전에는 그 그림자는 절대로 사라질 수 없다. 문제는 언어가 사유와 완전히 일치하는 일은 절대로 생기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신화가 인간 사유 역사의 초기 단계에서 좀더 강력하게 나타나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이라고 해서 신화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호메로스의 시대에 신화가 있었듯이 지금도 분명 신화는 있다. 다만 우리들 자신이 바로 그 신화의 그늘 속에 살고 있는 탓에, 그리고 우리 모두가 진리의 찬란한 빛으로부터 뒷걸음질치는 탓에, 그것을 감지하지 못할 따름이다. 신화는 좀 고차원적으로 말하자면, 언어가 정신활동의 모든 영역에서 사유에 행사하는 힘이다. 신화는 고대의 다양한 제도와 관습, 의례, 신앙 등이 통용되는 지역에서 그것들이 지속되는 것이 정당하다고 인정해 주거나, 그것들의 변경을 승인해 주는 성스러운 헌정 구실을 하는 극적인 이야기이다.

신화는 현재에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태고적 현실에 대한 진술이다. 인류의 현재 삶과 운명, 행위는 이 태고적 현실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태고적 현실을 알게 됨으로써 제의와 도덕적 행위의 수행 방법을 배우는 것은 물론 그것들을 수행해야 하는 동기와 목적까지도 공급받는다. 신화는 태고적 현실이 이야기로 되살아난 것이다. 신화는 내밀한 종교적 소망이나 도덕적 바람을 충족시켜주는 이야기이며, 사람들로 하여금 사회에 긍정적인 태도로 순응하게 해 주는 이야기이다. 신화는 심지어 실질적인 욕구까지도 충족시킨다. 신화는 원시 문화에서 없어서는 안될 기능을 수행한다. 신화는 믿음을 표현하고 강화하고 체계화한다. 신화는 도덕을 수호하고 관철시킨다. 신화는 제사의 효율성을 보장한다. 또 신화는 인간을 바른 길로 이끌기 위해 실질적인 규범들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신화는 인간의 문명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요소이다. 신화는 쓸데없는 이야기가 아니라 엄연하게 현실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힘이다. 신화는 이지적인 설명이나 예술적 창작물이 아니라 원시적 신앙과 도덕적 지혜를 담고 있는 실용적인 헌장이다. 우리는 과학적 사고를 통해 자연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화는 과학에 비해 인간에게 환경을 지배하는 데 필요한 물리적인 힘을 더 많이 가져다 주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신화는 매우 중요한 것 하나를 인간에게 주었다. 인간이 우주를 이해할 수 있다는 환상, 그리고 인간이 우주를 이해하고 있다는 환상이 바로 그것이다.

신화는 미래를 지닌 과거로, 현재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신화를 창조한다는 것, 다시 말해 좀더 나은 현실을 찾기 위해 감각이라는 현실 이면으로 들어가는 것은 인간의 영혼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극명하게 드러내 주는 징표이자, 인간의 영혼이 무한히 성장하고 발전해 나갈 수 있음을 입증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신화는 천계의 이야기를 세속의 이야기하듯 하고, 신들의 이야기를 인간의 이야기하듯 한다.

신화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낯익은 세계가 그 자체 안에 존재의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믿음이 표현되어 있다. 이 세계의 존재 근거와 한계는 우리에게 낯익고 우리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것들 너머에 존재한다는 믿음, 우리 세계는 그것의 근거이자 한계인 신비한 힘에 의해 지배되고 항상 그 신비한 힘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믿음이 신화에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과 더불어 신화는 우리의 주인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는 인식, 우리는 낯익은 세계 내에서도 독립적이지 못하지만 특히 낯익은 모든 것들 뒤에서 그것을 지배하는 힘에 우리가 종속되어 있다는 인식, 우리가 그 힘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의 여부도 엄밀하게 그 힘의 의지에 달려 있다는 인식을 표현하고 있다.

신화는 인간들에 대해 이야기하듯이 신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인간의 행동에 대해 이야기하듯이 신들의 행동에 대해 이야기한다. 신들이 인간보다도 월등한 힘을 지닌 존재로 그려진다는 점, 신들의 행동이 예측불가능하며 자연의 흐름을 거스를 수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는 점만이 다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화는 신들을 우월한 힘을 지닌 인간으로 만든다. 이 점은 신화가 신의 전지전능함에 대해 이야기할 때조차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신화는 신의 전지전능이 인간의 힘과 지식과 질적으로 다르다고 보지 않고 단지 양적으로만 차이가 난다고 보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신화는 초월적인 것을 내재적인 것으로 구체화한다. 그리하여 초월적인 것은 인간의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것으로 변한다. 이 점은 숭배가 갈수록 신들의 노여움을 피하고 은총을 얻기 위한 계산된 행위로 변해 간다는 사실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인간의 역사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신화뿐이다.

바벨탑 이야기는 바빌론에 있는 미완의 마르둑 신전이 주사막 민족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만들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들은 미완의 상태에서도 장엄하기 그지 없는 그 사원을 보고, 그 사원이 미완성 상태로 남게 된 이유를 추론하기 위해 바벨탑 이야기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바벨탑 이야기가 만들어진 직접적인 목적은 세계의 언어와 문화가 제각각 달라지게 된 원인을 신화에 의거해 설명하자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신화의 언어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대상에 대한 기술적 파악을 그 대상의 특성에 대한 종교적 체험과 결합시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종교적 체험은 일상 생활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지만 다른 언어를, 즉 종교적 상징의 언어를 요구하고 종교적 상징들의 결합체인 신화를 요구하는 방식으로 일상 생활을 뛰어 넘는다. 종교의 언어는 현실과의 일상적인 기술적 접촉 영역에 속하는 사실이나 사건들을 해석할 때조차도 상징적이고 신화적이다. 이 두 언어의 혼란이 과학 이전의 시대에 일상적으로 부딪치는 현실을 이해하는 데, 즉 기술적 이용의 대상을 이해하는 데 장애 요인으로 작용했듯이, 오늘날에는 종교를 이해하는 데 아주 심각한 장애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부딪치는 언어가 그렇듯 신화의 언어도 문학의 언어나 과학의 언어 같은 다른 종류의 언어로 옮겨질 수 있다. 종교의 언어와 마찬가지로 문학의 언어도 상징이 생명이다. 그러나 문학의 상징은 종교의 상징과는 다른 차원에서 인간과 현실의 부딪침이 갖는 특성을 표현한다.

잃어버린 신화, 잊혀진 신화, 익명의 신화가 나의 작업에 어떠한 형태로 상징화, 형상화되어 나타날지 그것은 미지수이다. 그리고 언제까지 이러한 작업이 계속되어질지도 미지수이다.

2001년 9월 15일에 素石軒에서 윤여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