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천신문

- 1994년 9월 20일(화)자

칼 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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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도제도에서 가장 큰 쿠바 섬과 3천7백 14개의 작은 섬으로 구성된 나라 쿠바는 아메리카 대륙에 최초로 설립된 공간국가이다. 작금의 쿠바난민 대규모 해상탈출사태의 참상을 TV를 통해 지켜보면서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연상케 한다.

쿠바의 카스트로는 1961년 미국과의 국교를 단절하고 소련과 접근, 경제. 군사적으로 소련에 의존하게 되자 이에 미국은 강경 경제 해상 봉쇄 조치를 내렸었다. 당시 쿠바 경제의 중추적 기능은 미국 자본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카스트로는 정권유지 차원에서 소려과 손을 잡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오랜 독재정권도 소련 및 동구권 국가들의 몰락으로 경제원조가 끊기고 경제적 파탄에 이르자 카스트로는 이제 그야말로 난민 방출을 조장하면서 클린턴과 협상카드를 내 놓고 있다. 급기야 미행정부는 쿠바인에 대한 비자발급 요건등을 완화해 주는 대가로 난민 방출을 중단시켜 줄 것을 쿠바측에 제의하고 있다. 클린턴은 쿠바난민 탈출사태의 해결을 위해 세가지 대쿠바 이민정책의 수정을 제의했다.

탈출자에게 난민 지위를 부여하여 이민을 허용하는 쿼터를 현재의 3천명에서 상향 조정하고 가족 초청이민의 범위를 직계가족외에 사돈이나 조카에 까지 확대 적용하며 현재 억류되어 있는 2만명의 탈출자들에게 합법적인 이민의 길을 열어 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클린턴의 이같은 새 정책은 의회와 인권 단체들로부터 위법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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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은 쿠바 참상을 우리는 과연 남의 나라 얘기로만 볼 수 있을 것인가. 콜럼버스가 쿠바섬을 발견한 것은 제 1차 항해 중이던 1492년이었다. 당시에는 5만여명의 원주민들이 고도로 발달된 농경사회를 이루며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19년후 스페인은 벨라스케스를 파견하여 식민지 체제를 확립하였다. 원주민들은 사금 채취와 농장 등에서 혹사당한데다 스페인 반란, 전염병등으로 거의 멸종상태에 이르렀다.

16세기초부터 스페인인들은 아프리카 흑인 노예를 수입, 담배, 사탕수수 재배에 종사시켜 막대한 이윤을 거둬 들였고 19세기 까지 쿠바에 수입된 흑인 노예 수는 백만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메리카 대륙에서 일어난 독립전쟁의 영향이 이곳에도 파급되어 1812년에는 대규모 흑인 반란이 일어났다.

그후 10년에 걸친 독립전쟁이 종식되었으나 스페인의 약속 불이행으로 2차 독립전쟁이 시작되고 1898년 아바나항에 정박중이던 미국 선박 메인호에서 원인모를 폭파사건이 일어나 미국은 스페인에 선전 포고를 하고 이 전쟁에 개입하였다.

그 결과 전쟁은 4개월만에 미국의 승리로 끝나고 파리 평화조약이 체결되어 스페인으 ㄴ쿠바의 독립을 승인하게 된다. 그러나 종전후 미군정이 실시되고 양질의 토지, 사탕산업, 교통수단 등 쿠바 경제를 미국 자본이 장악하게 된 것이다.

카스트로도 집권 초기에는 외교정책의 기조를 모든 나라와의 평화 공존, 내정 불간섭이라고 하여 중립정책을 선언하였으나 대지주의 토지와 대기업의 국유화로 미국계 사탕, 석유회사 접수 등 개혁을 단행하여 미국과 대립하다가 결국 단교로까지 가게 되었다.

우리나라도 만일 독립이후 북한 공산체제로 넘어 갔더라면 오늘날 제2의 쿠바 사태와 같은 참상이 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몸서리 쳐 진다.

차제에 박홍총장이 밝힌 주사파세력들은 사상적 집착에서 벗어나길 바라고 극소수 강자의 사상이념 논쟁에 의하여 대다수 사람들이 피해를 당하거나 죽어가는 일들이 다시는 일어나질 않길 바랄뿐이다.


[尹汝煥 | 충남대 교수 .본사칼럼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