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하는 갈대 | Contemplative Reed


파스칼은 그의 유고집 팡세에서 한줄기 갈대를 통해 사유를 설명했다. 나는 염소의 사유를 갈대의 사유와 함께 조합된 이미지로 도출해 내고자 한다. 그것이 이번 전시의 화두인 사유하는 갈대이다. 그러나 내가 그린 갈대는 파스칼의 갈대가 아니라 동양적 명상에서 추출된 사유하는 갈대이다.

인간이 동물의 질서에서 엄연히 구별하는 근본 특색은 생각하는 능력에 있다. 그러나 나는 염소(羔羊)에게서 사유를 발견하고 그것을 애써 그림으로 천착하려고 하였다. 마치 노천명이 사슴을 통해 사유를 표현한 것 처럼, 본능적 충동으로 살아가는 염소에게 이성을 부여한 것이다.

나는 줄곧 수많은 선의 중첩과 축적, 그 철저한 그리기 행위를 통해, 철학적 사유를 이끌어 내기 위한 [사색의 염소]를 그려왔다. 다시 그 염소의 사유를 문자적 코드로 인식한 [사유문자]가 나왔는데, 그 사유문자는 일련의 [묵시찬가]와 함께 언어와 소리를 표현한, 일종의 서양의 칼리그라피처럼 자동필기되는 문자적 코드이다.

만(滿)과 공(空)의 반복이 이어지면서 다시 그 문자적 조형을 버리고 염소 그 자체의 제스처인, [사유하는 몸짓]으로 표현하기에 이르렀다. 부처가 태자시절에 인생무상을 느껴 고뇌하는 명상자세에서 기원하였다는 반가사유(半跏思惟)의 불상이나, ‘생각하는 사람’의 로댕은 손의 제스처를 통해 사유를 이끌어 내고 있다. 나는 그러한 사유의 제스처를 염소의 몸짓으로 풀어내고자 하였다.

이제 [사유하는 갈대]라는 키워드로 빈 백색공간 위에 생체적 질서와 웅혼한 기상을 담은 부유하는 사유세계를 표출하고 싶다. 신을 발견한 파스칼은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 신의 침묵에 두려움을 느꼈다. 나는 그 공간의 일부를 캡처한 사각의 빈 공간의 틀 안에서 자유로운 유영을 하고 있다. 그 생명의 기로 가득채운 사유기행록을, 불가해한 오묘함의 무한 공간에 띄워 하이퍼링크를 걸어 두고 싶다. 화면 전체에 확산되는 흰 띠의 기운 서린 운로망(雲路網)은 현실의 차안(此岸) 공간에서 안개 터널을 지나 꿈꾸는 피안의 구름 공간으로 전이되는 상상의 이미지 맵이 된다. 

고단한 삶의 여정, 존재론적 고통과 번민의 과정 속에서 삶의 원상을 발견하고 그것을 사색의 마른 풀을 뜯는 염소와 정적의 새, 바람에 서걱이는 갈대의 이미지를 통해 응축적으로 형상화 해 본다. 그 슬픔과 분노를 외면한 듯한 침묵의 자세는 마치 구도자적 표정이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서려 있는 세상에 대한 열정과 고뇌와 회한이기도 하고, 자아성찰에 대한 의지의 발현체이기도 하다.

 

2004년 7월 4일 素石軒에서 윤여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