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하므로, 이에 문자를 남기다 -
김상철/공평아트센터관장,미술평론가


작가마다 그 작업을 연상케하는 특정한 이미지나 조형 부호들이 있게 마련이다. 특정한 색감이나 형상, 혹은 특징적인 사물 표현 등을 통하여 형성되는 이러한 내용들은 단순히 작가의 작품세계를 떠올리게하는  시각적 이미지로 존재하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작품 전반을 아우르는 관건적 내용을 내재하고 있는 '의미있는 것'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작가 윤여환의 경우 염소는 바로 작가로서의 염소는 작가로서의 윤여환과 그 작업을 연상케 할 정도로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다. 사실 작가의 경우와 같이 이렇게 분명하고 특징적인 상징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그다지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고 보면 이러한 등식의 성립 자체가 자못 흥미로운 것이 아닐 수 없다. 지난 80년대 초 중앙미술대전의 우수상 수상작이었던 <여명>이라는 제목의 염소그림은 이러한 작업 역정의 시발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산수, 인물이 주를 이루던 한국화단에 영모에 속하는 작가의 염소 그림은 희소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精緻)하고 정교한 묘사와 표현은 관심을 끌기 충분한 것이었다. 세필을 수 없이 반복하며 잇대어 그어가는 터럭 하나하나의 묘사를 통하여 표출되는 염소 특유의 생기와 자태는 서정적인 감상이 짙게 배어있는 것이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목가적인 서정성을 바탕으로 한 사실적인 염소 그림은 이후 일정 기간 지속되며 점차 작가의 작업을 상징하는 조형 부호와도 같은  것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사실 초기의 염소 그림들은 염소의 생태적인 특징을 관찰하고 이를 포착, 표현하는 전형적인 영모화의 그것이었다. 80년대 중반에 들며 점차 대상이 되는 동물들의 객관적 형태의 엄격함에서 벗어나 점차 수묵이 강조되는 조형적 변화를 보이던 작가의 작업은 90년대에 들어 돌연 인물 조형이라는 획기적인 변화를 보여 준다. 수묵 추상과 연계되어 나타났던 이 시기의 작업들은 분방하고 격정적인 화면의 경영으로, 이전의 정치한 채색화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파격적인 것이었다. 이를 이어 <익명의 초상>, <묵시찬가>, <사색의 여행>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변화 과정은 바로 작가의 작업이 단순한 기법, 소재 등의 변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업관 근본에 변화가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특히 <묵시찬가>라는 이름으로 발표되었던 92년 개인전의 작품들은 작가의 새로운 작업에 이정을 달리하는 상징적인 것으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다양한 작업 세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윤여환과 염소를 함께 연상케 되는 것은 그의 화면에 등장하는 염소의 강한 상징성 때문일 것이며, 더불어 작업의 변화 추이에서도 나타나고 있듯이 그 변화의 역정을 고스란히 수용하고 수렴하는 물화(物化)된 존재로서 여전히 염소는 관건적인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초기의 작업들이 육안(肉眼)에 의한 객관적 사실에 주안점을 둔 것이었다면, 90년대 이후의 작업들은 상대적으로 심안(心眼)을 바탕으로 한 주관적 사유의 한 정점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고대문자를 연상시키는 문자, 혹은 부호와도 같은 상형들을 병렬시켜 화면을 메워 가는 <묵시찬가>라는 일련의 명제를 지닌 작업들은 "종교적 관조, 즉 묵상 중에 절대자와의 묵시적 교감을 통한 신비 체험을 하게 되었고......그 체험은 나로 하여금 새로운 영감을 불러일으키게 하였고, 절대자를 찬미하는 모종의 글을 쓰게 하였으며, 그것은 자동에 의한 속필의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라는 작가의 말과 같이 특정한 종교 체험을 조형화한 것이다. 이로써 작가의 작업은 객관과 사실이라는 부담감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기성의 축적된 조형 경험으로부터도 자유스러운 독특한 표현 양식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근래에 선보이는 <사유문자>는 <묵시찬가>와 마찬가지로 자동필기의 무위성을 지닌 일종의 문자 추상이다. 형태로 보면 한자의 서체를 연상시키는 속도감 있는 운필이 두드러지는 <사유문자>는 해독의 대상이 아니라 특정한 사유의 본질을 상징하는 언어적 도상이라 할 것이다. 작가는 "나의 일련의 <사유문자> 작업들은 어떤 미지의 사유 세계로 가고자하는 열망에서 표출되는 불명확한 미적 행위"라고 해설하고 있다. 즉 작가의 <사유문자>는 인간의 보편적인 이해나 가치는 물론, 시공적 한계까지도 초월하는 지극히 내밀한 영적인 세계에의 희구를 조형 부호로 펼쳐 놓은 것이다. 행위의 근본이 되는 종교적인 체험이나, 무의식에 의한 자동 기술의 문자 조형이나 모두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지만, 이를 조형화하는 수단으로 문자의 형태가 차용되었다는 점은 흥미로울 뿐 아니라 그것이 모필에 의한 한자 서예의 양식과 대단히 흡사하다는 점 역시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모필을 표현 도구로 사용하는 동양 회화에 있어서 서예는 종종 회화와 같은 뿌리를 둔 이웃한 조형 체계로 인정되곤 한다. 심지어 '서화동원(書畵同源)이라 할 만큼 조형요소에 대한 공유성이 강한 것이 사실이다. 이는 특히 모필에 의한 필선의 기능과 가치, 의미 등에 해석에 있어서 두드러진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자면 서화는 같은 근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서예의 조형적 경험과 심미적 축적을 회화가 차용하였다는 점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 즉 서예의 기성적인 조형 요소들을 문인화가들이 등장하면서 이를 회화에 원용함으로써 같은 뿌리를 공유하게 된 것이다. 작가의 <사유문자>에서 강하게 드러나고 있는 모필의 심미는 바로 이러한 서예에 있어서의 축적된 조형 요소와 심미적 내용들을 적극적으로 차용하고 수용한 결과라 할 것이다. 일단 작가는 사유를 수용하는 형식에 있어서 전통적인 문인화적 가치관을 바탕으로 한 조형 체계를 선택한 셈이다.

'보편적인 이해는 물론 시공적 한계까지도 초월한 지극히 내밀한 영적인 세계'로서의 사유의 본질에 대해 작가는 "나는 종교적 관조, 즉 묵상 중에 절대자와의 묵시적 교감을 통한 신비 체험을 하게 되었고, 나의 이성적, 합리적인 지식과 일상적인 감각 세계, 내면 의식을 완전히 뒤바꿔놓기 시작하였다. 깊은 내면적 세계에 침잠하여 초자연적, 초감각적 실존을 느끼고 그것과 일체화됨을 느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같은 해설은 장선(張先)의 그것과 다분히 근접한 것이다. 즉 옳고 그름, 좋고 나쁨 등은 물론이거니와 생과 사와 같은 궁극적인 문제에 이르기 까지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으로, 인간의 이성적, 합리적 판단을 뛰어 넘는 절대 가치를 추구하며, 이러한 가치에 융화, 순응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일체의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것을 배제하며 가시적인 현상보다는 현상 너머의 내면적인 본질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이는 작가의 사유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더불어 실존적 자아에 대한 끊임없는 회의와 물음을 세속적이고 이성적인 가치에서 벗어나 초탈한 영적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며, 이른 바 물화(物化)는 이를 일컬음에 다름 아닌 것이다. 작가가 자신의 <사유문자> 작업들을 '어떤 미지의 사유 세계로 가고자 하는 열망에서 표출되는 불명확한 미적 행위'라고 정의한 것을 보면 이는 절대 자유를 지닌 영적인 가치에 대한 희구와 갈망이라 할 것이다.

사실 작가의 <사유문자>는 극히 개인적인 종교적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자동 기술이라는 독특한 조형 방식을 취하고 있어 이를 조형화한다는 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닐 것이다. 작가는 비록 '사유에 의해 유추된 문자로 내면의 무의식 세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사유문자>를 정의하고 있지만, 그것이 모필 심미의 특정한 내용들을 수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내면적 사유의 세계 역시 장선의 그것과 일정 부분 부합되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는 일정 부분 선험적 지식에 의한 체계를 수용하고 있는 셈이다. 작가가 사유하고 있는 본질 역시 장선적 우주관, 가치관을 바탕으로 개별적인 영적 체험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종교적인 가치가 강조될 때 예술적인 덕목은 훼손되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한 조형의 세계를 이끌어 올림은 전적으로 작가의 능력이라 할 것이다. 형상의 번잡함과 현상의 허무한 가치에서 벗어나 무한한 절대 가치를 화두로 삼음으로써 작가의 공간은 그 영적 공간만큼이나 무한히 확대된 셈이다.

월간[美術世界] 2003년 7월호 109P~111P 게재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