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뿌리- 서천의 파평윤씨
(소정공 장영공파 36세손)

윤씨는 옛 문헌상에 149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현재는 44개의 본관이 있으며 이중 11개의본을 제외한 나머지 본관의 유래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으나 해평, 무송, 칠원, 해남, 평산을 제외한 모든 본관은 파평 윤씨에서 분관하였다고 한다.그리고 나머지 남원 윤씨,신영 윤씨, 야성 윤씨, 함안 윤씨, 평산 윤씨 등은 파평으로 다시 합본 이 되었다고 한다.
윤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592명에 상신 18명,문형(대제학)40명, 왕비(폐비1명 포함)6명, 부마 7명, 봉군 7명을 배출하였다.

파평 윤씨(坡平 尹氏) 의 시조 윤신달(尹莘達)은 태조 왕건을 도와 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건국하는데 공을 세운 개국공신으로서 태자를 교육시키는 태사삼중대광에 봉해졌다. 그의 5세손인 윤관(尹瓘,1040~1111) 장군은 고려 문종때에 문과에 급제하고 1107년(고려예종3년)에 별무반이라는 특수 부대를 편성한뒤 여진정벌에 나서 적 5천명을 죽이고 130명을 생포하는 등 북진정책을 완수한공으로 영평(파평)백에 봉해져 후손들이 본관을 파평으로 하였다.

파평 윤씨의 시조 윤신달의 탄생설화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893년(진성여왕 7년) 경기도 파주군 파평면 눌로리에 있는 파평산 기슭에 용연(龍淵)이라는 큰 연못이 있었다. 어느날 이 용연에 난데없이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서리면서 천둥과 벼락이 쳤다. 마을 사람들은 놀라서 향불을 피우고 기도를 올린지 사흘째 되는날, 윤온이라는 할머니가 연못 한 가운데 금으로 만든 궤짝이 떠 있는 것을 보고 금궤를 건져서 열어보니 한아이가 찬란한 금빛 광채 속에 누워 있었다. 금궤 속에서 나온 아이의 어깨 위에는 붉은 사마귀가 돋아있고 양쪽 겨드랑이에는 81개의 잉어 비늘이 나 있었으며, 또 발에는 황홀한 빛을 내는 7개의 검은 점이 있었다. 윤온 할머니는 이 아이를 거두어서 길렀으며 할머니의 성을 따서 윤씨가 되었고  파평산 아래 연못에서 나왔다하여 본관을 파평으로 하였다. 잉어에 대한 전설은 윤신달의 5대손인 윤관의 일대기에도 또 나온다. 윤관이 함흥 선덕진 광포(廣浦)에서 전쟁 중에 거란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여 강가에 이르렀을 때 잉어떼의 도움으로 무사히 강을 건너 탈출하였다. 이번에는 장군의 뒤를 쫓던 적군이 뒤쫓아 강가에 이르자 윤관 장군에게 다리를 만들어 주었던 잉어떼는 어느틈에 흩어져 버리고 없어졌다. 그래서 파평 윤씨는 잉어의 자손이며 또한 선조에게 도움을 준 은혜에 보답하는 뜻으로 잉어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묘는 경북 영일군 기계면 봉계동에 있다.

5世孫인 윤관(尹瓘,1040~1111)은 고려 중기에 문무를 겸비했던 재상으로 동북면 여진족을 정벌하고 9성을 쌓고 공험진에 고려의 강역을 표시하는 비석을 세웠다. 이로써 추충좌리 평융척지 진국공신 문하시중 판상서 이부사지 군국중사가 되어 영평현(파평의 별호) 개국백에 봉해져 그 후손들이 중흥조로 삼고 있다.

서천에 거주하는 윤씨는 남원관으로 분파된 (문산면 구동리) 남원윤씨외에는 문강공 언이의 후손들로 소정공파(昭靖公派), 태위공파, 성안공파 후손들이 거주한다.

그 중에도 소정공파가 군내 전역에 분포하고 있으며 태위공파는 장항읍 성주2리에 5-6호가 거주하고 있고, 성안공파는 서면 마량리에 5-6호가 거주한다.

소정공파는 파조(派祖) 尹坤(15세손)이 고려의 문과에 급제하고 조선 정조 2년(1400) 제2차 왕자의난에 방원을 도와 공을 세워 좌명공신 2등으로 파평군에 봉해 졌다. 그후 여러 관직을 거쳐 우참판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소정의 시호를 받았다. 그 후손들이 소정공파로 분파되었다. 소정공 윤곤은 백이숙제와 같은 절조를 바란다는 뜻에서 희이, 희제로 이름지었다 한다. 첫째에서 대가 끊겨 그의 둘째아들 尹希齊(정헌대부 호조판서, 判漢城府事)가 대를 이었 4형제의 아들(坰-垠-培-壎)을 두었는데 서천에는 장자 윤경(尹坰-백천군수,추충적덕병의보조공신, 참판, 영의정 추증)의 아들 尹弼商이 이시애의 난때 도승지로 공을 세워 파평군에 봉해지고 우참판에 올랐다. 그후 명나라가 건주위(建州衛)를 토벌할 때 西征 도원수로 출전하여 공을 세웠으며 영의정에 올라 기로소에 들어 연산군 2년 궤장을 하사받았다. 그 후손들이 영상공파이다.

영상공파의 서천 입향조는 24세 정랑(正郞) 尹希仁과 교위(校尉) 윤호인이 강해군의 폭정으로 1618년 벼슬을 버리고 시초면 후암리 야방동으로 낙향하여 그 곳에 터를 잡아 자손이 크게 번성하였다.  그 후손은 마서면 옥산리에 90여호, 남전리 합전에 10여호, 옥북 남방에 15호, 월포 동촌에 10여호, 판교면 상좌리에 몇호가 거주한다.

장영공파(掌令公派)는 장영공 尹培(17세손)가 향조로, 26세 윤혜교(尹惠敎)가 1714년(숙종40) 때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이조판서, 兩館 대제학을 역임하였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文溫의 시호를 받았다. 31세손 중에 윤자학 은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국가에서 [효자 정려비각-1886년](사진)을 기산면 신산리에 세웠다. 그 후손들은 기산면 원길리에 14호, 판교면 우라리에 14호, 장항읍 옥남리에 5-6호가 거주한다.

上系系譜
태사공 莘達(1세)→ 先之(2세)→ 金剛(3세)→ 문정공 執衡(4세)→ 문숙공 瓘(5세)→ 문강공 彦이(6세)→ 惇信(7세)→ 商季(8세)→ 復元(9세)→ 純(10세)→ 문현공 珤(보,11세)→ 安淑(12세)→ 영평군 陟(척,13세) →충간공 承順 (14세)소정공 坤(15세)→希齊(16세)

소정공 장영공파 계보
培(17세)→ 師殷(18세)→ 倬(19세)→ 先知(20세)→ 暾(21세)→ 昌世(22세)→ 燧(23세)→ 舜擧(24세)搢(25세)→ 惠敎(26세)→ 東善(27세)→ 光德(28세)→ 哲圭(29세)→ 益鎭(30세)→滋鶴(31세)→相鼎(32세)→義炳(33세)澤重(34세)建錫(일명 壽德,35세)
汝煥(36세)→ 一植(일명 大元, 37세)

장영공파 후손 중 윤장교의 후손은 마서면 송석리에 5-6호가 거주한다. 남성리에는 장영공파로 노성 5방파의 셋째집인 충헌공파이며 윤전이 광해군때 문과에 급제하고 병자호란때 弼善으로 강화도에 들어가 적과 싸우다 전사함으로써 충헌의 시호를 받았다. 입향조는 27세 진사 윤동후가 숙종때에 부여군 양화면 시음리에 낙향하여 정착했으며 그 후손 한줄기가 화양면 남성리에 이주하여 10여호가 거주한다.

領相 윤필상의 후손으로 32세 환성 윤광의는 조선 말기의 예학자로 동국 도덕연원을 이어받은 숙재 조병덕의 문인이며 특히 송병준, 최익현,과 친교가 두터웠고,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후진 양성과 학문 탐구에 열중했으며, 태극도설, 사례취요 등 23권의 저서를 남겼다. 그의 학문과 덕행은 널리 알려져 따르는 자 많아  마서면 옥산리에 옥산사(玉山祠)를 세우고 9월 중 丁일에 유림들이 제향한다.

◆소정공 장영공파 항렬표- 鎭(30세)→滋(31세)→相(32세)→ 炳(33세)→ 重(34세)→ 錫(35세)→ 汝(36세)→ 植(37세)→ 燮(38세)→ 達(39세)→ 鍾(40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