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본관 풍양(豊壤). 자 경수(景綏). 호 죽계(竹溪). 찰방 덕기(德期)의 아들.

1573년(선조 6) 진사(進士)가 되고, 1579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 사관(史官)을 거쳐 전적(典籍)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함경도로 세자(世子)를 호종(扈從)하고, 난이 끝난 뒤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1599년 풍덕군수(豊德郡守)가 되고, 1613년(광해군 5)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하는 계축옥사 때 삭직당하였으나 호성(扈聖)의 공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풍녕군(豊寧君)에 봉하여졌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광해군 때의 공훈을 삭훈할 때 관작을 추탈당한 이후 임천(林川)의 전리로 돌아가 저서에 힘썼다.

그는 광해군 때 폐모론이 일어나고 대비의 호를 깎아서 서궁이라 칭하게 하는 간당백료(奸黨百僚)의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아 강직한 사람으로 평가되었다.

문집에 《죽계유고(竹溪遺稿)》가 있다.

參考文獻 : 光海君日記. 仁祖實錄.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죽계일기(상.하)_조응록 저 |조남권 역 |태학사|1999 한서대학교 부설 동양고전연구소 국역 총서 3번째권. 조선 중종 33년에 출생한 죽계 조공에 의해 쓰여진 <죽계일기>를 한자 원문과 우리말로 엮은 책. 선조 25년인 1592년부터 광해군 7년 1612년까지 임진왜란시 호남지방 순행기부터 날마다 보고 들은 것을 기록했다.

 

 

 

죽계 조응록 영정 이모본 제작기

 

죽계영정의 특징 : 오사모에 흑단령을 입고 의자에 앉아있는 전신교의좌상으로, 좌안칠분면을 취하고 있다. 사모의 높이는 상당히 낮으며 사모의 양각은 운문이 담묵으로 처리되어 있다. 흉배는 정3품이 착용하는 백한흉배와 삽은대를 두르고 있다. 단령의 트임 사이로는 노란색 내공과 녹색 철릭이 보이며 양발은 팔자형으로 돗자리를 깐 목제 의답(족좌대) 위에 놓여있다. 17세기특색이라 할 채전(彩氈)이 깔려 있는데 진채의 문양은 털의 질감을 살려 점묘식으로 처리되어 있으며 화려한 채색은 공신상의 장중한 분위기를 한결 돋우어준다.

신영정이모본 제작기법 : 죽계영정은 75세 때인 1617년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처음 그려졌을 원본영정의 상태를 복원하는데 주력하였으나 원본이 너무 많이 훼손되어, 없어진 족좌대와 채전등은 당시의 영정들을 참고하여 복원하였다. 당시의 이모본은 1632년에 제작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18세기이후의 기법이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보아 후대인이 중간에 덧칠한 것으로 사료되어 원본영정과 같은 시대 지인이었던 [유숙영정(1564~1636)]과 [이호민영정(1553~1634)], [임장영정(1568~1619)]등을 참고하여 복원하였다. 원본은 음영법이 전혀 사용되지 않았는데 당시의 이모본은 음영법이 많이 적용되었고 안면부분도 음영이 깊고 건강하지 않은 느낌을 주므로 원본용모의 품격을 충실히 따랐다. 당시에 제작된 이모본의 의상을 보면 의습선에 음영법이 가미되어 있어 보기에는 좋으나 후대영정들에서 나타나는 기법이므로 그 시대와 맞지않아 평면적으로 그려진 원본의 기법에 따랐다.

영정크기 : ◎원본 - 104cm x 156cm ◎당시의 이모본 - 95cm x 156cm ◎현재의 이모본 - 104cm x 192cm

원본은 하단부분이 훼손되어 없어졌으나 좌우길이는 살아있어 좌우길이에 맞추었고 하단부분을 복원하였다.

당시의 이모본은 좌우길이마져 여러번 표장과정에서 잘려나가 길이가 좀 짧다. 그래서 원본의 길이에 맞추었다.

영정소장처 : ◎원본 - 부여정림사지박물관 ◎이모본 - 부여랑산서원 랑산사(충남 부여군 세도면 수고리 579-2) 봉안

 

 

조응록영정 신이모본
전신좌상(인쇄용)

조응록영정 신이모본

조응록영정 신이모본
표장상태

조응록 영정
신이모본과 정본비교

조응록영정
원본

조응록영정
당시의 이모본

조응록영정 신이모본
초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