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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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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는 본시 동물그림에서 출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원시 동굴벽화나 암석채화, 암각화 등에 동물들이 많이 묘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나의 본격적인 작품활동은 동물회화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이 지금도 내 작품의 중요한 조형적 구성요소로서 작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유년시절 염소와 함께 자라던 시골 마을의 정서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묻어 나오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80년대 중반까지 나의 동물회화는 줄곳 염소나 소를 주제로 하여 자연주의적 시각으로 분석하는 작업을 견지해 왔다.

80년대 후반부터는 환경과 정신적 변화로 소재가 풍경과 인물, 추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해지고 현저한 방법적 변이를 가져와 보다 대담한 운필의 격정이 실린 표현주의적 색채가 농후해 지면서 소재주의적 틀에서 점차 벗어나게 되었다.

이같은 변모의 추이를 거쳐 92년 2회 개인전에서는 종교적 영감과 신비체험에서 얻어낸 <묵시찬가>라는 특이한 패턴의 문자추상회화를 발표하였다. 즉, 자동기술에 의한 심령글씨가 나의 순수한 조형적 사고 속에 끼어 들어오면서 새로운 조형체험을 하게 되었다.

정신적 방황과 고뇌, 공포와 고통 속에서 무의식적 외침과 몸부림이 분출된 세계, 그 잿빛 무속과 흑암의 늪에서 빠져나와 기독신앙의 빛에 감전되어, 이끌리듯이 마음껏 영적 <묵시찬가>를 구가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종교적 열정과 조형적 방임은 결국 나를 자유롭게 하질 못하여, 버려둔 염소를 다시 찾는 즉, 본연의 자아를 찾는 작업에 들어가게 되었다. 93년 여름부터 시작한 염소회화 작업인 <사색의 여행> 연작이 바로 그것이다.

그 다시 찾은 염소는 단순히 풀밭 위의 염소가 아닌 사색의 마른풀을 뜯는 염소, 시공을 초월한 환상 속에 자리한 염소로 탈태되고 있다.

염소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의미나 성격등 대상 그 자체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단지 감정 표현의 기본 매체로서만 존재한다. 염소의 눈을 통해 비춰지는 내 자신의 삶의 표정, 진솔한 삶의 이야기를 토로하고 때때로 떠올려지는 어떤 생각의 가닥을 잡아 감각적 표출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다분히 심상적 조형 세계에로 침잠하고 싶은 것이다. 동양적 미의식과 사유의 세계, 즉 선적 명상과 기운사상, 관조의 미학에 접근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염소가 사색의 모티브가 되어서 선험적 인식과 기억의 세계, 묵상과 사유를 통해 투영되는 초자연적 미지의 세계, 상징과 메타포적 형상의 부유, 원형에 속박되지 않는 관념적이고 감각적인 비형상의 유희 등 무의식적 내면의 세계를 자유롭게 여행하고 싶다.

시간의 무의미성과 영원성을 나타내는 것들, 곧 이미 수억년전에 풍화와 침식작용에 의해 만들어진 돌들 그리고 시대와 역사와 문화가 바뀌어도 모습이 변하지 않는 한국 토종의 염소를 통해 자연의 진리인 미의 본질에 좀더 가까이 가고 싶은 것이다.

이렇게 염소에 집착하는 이유는 어떤 의미에서 나 자신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물음에 대한 해법을 찾고 있는 것 인지도 모른다.

표현 형식면에서는 사실과 변형의 접목, 평면과 부조의 병립, 구상과 추상의 분리된 세계 통합, 좌우 상하 구분 해체, 재료의 한계성 극복 등을 형식적 기조로 하고 있다.

인물과 함께 등장하는 경우에도 일반적으로 사람이 염소를 끌고 다니는 가축으로서의 개념이 아닌, 인간과 동등한 관계거나 염소를 주체적 대상으로 놓아, 서로 현실적으로 만날 수 없는 상황이나 소재라도 얼마든지 가능하도록 연출하고 있다.

또, 원시시대 동물 암각화의 이미지나 발견되지 않은 유적의 단편 같은 형상을 서로 다른 공간에 포치시켜 보고 있다.

늘 화폭에서 신비와 환상의 세계를 찾아가고 발견하는것 그것은 나에게 참으로 즐거운 일이다. 염소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 눈빛이나 표정에서 다분히 철학적이고 사색적이며 종교적인 느낌을 받는다. 내가 전생에 염소였다는 어느 신들린 할머니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나는 염소에게서 남다른 감동을 받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내가 즐겨 사용하는 기법 중에 적선법(積線法)이 있다. 조선시대 김두량의 개그림이나 윤두서의 자화상 그리고 작가미상의 "맹견도"에 나타난 털묘사는 주로 단필로만 구성되어 있는데, 나는 선을 겹겹이 긋고 습묵으로 다져 준 뒤에 다시 선을 차곡 차곡 쌓아가는 화법을 사용한다.

 

2

자연율, 그 정형을 찾아 좀더 철저하고 깊이 있게 파고 들어가고 싶다. 그리고 그 형태를 부순다. 마음껏 잡았다가 놓아 버린다. 잃어버렸던 형태를 찾아 마음껏 형태미를 즐기다가 파형의 길, 무형의 길로 간다.

힘껏 들이마셨다가 내쉰다. 마음껏 먹었다가 전부 토해 낸다. 금식한다. 속을 비워 낸다. 마음을 비운다. 그리고 관상한다. 보고 즐긴다.

모든 삼라만상은 조화로서 이뤄진다. 생명은 곧 조화를 뜻한다. 모든 생체는 스스로 조화되려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반면에 변화를 좋아하는 본능도 있다.

질서는 안식을 주지만 곧 건조해져 무료함, 권태로움을 낳고 그 지리함에 지쳐 그 틀에서 뛰쳐나온다. 그 틀이 부서진다. 변모한다. 파괴와 개혁이 온다.

부조화는 파멸과 죽음, 소멸을 뜻한다. 거듭난다. 재생된다. 죽음으로써 다시 태어난다. 버림으로써 다시 소유한다. 새질서와 새생명, 새로운 창조가 시작된다.

내가 지금 잡으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유를 끊는다. 사유를 넘어 직관으로 간다.

논리적 사유는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만 낳는다. 자신의 자아는 죽어야만 한다. 완전히 죽는 자는 완전히 살아날 것이요, 반만 죽는 자는 반만 살아날 것이다.

깨달음은 곧 진리 체험이다. 깨달음은 지적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직관이다. 정욕, 정념을 버린다.

자유, 자유분방하게 표현하고 싶다. 완전히 풀어진 그림을 그리고 싶다. 어느 한 곳이든 힘이 들어가면 완전히 자유롭게 구사할 수 없다. 집착과 욕심을 버린다. 기교와 구도를 완벽하게 구사한다. 그리고 나서 그것을 버린다. 공심에서 포만을 느낀다.

 

1997년 8월 素石軒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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