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 발행 시사주간지
뉴시스아이즈
제108호(11월24일자)

 

[뉴시스아이즈]전준엽의 미술 산책-윤여환의 '생각하는 염소'

기사등록 일시 : [08/11/18] / newsis.com All rights reserved

【서울=뉴시스】 思惟得理·90.9×72.7㎝·장지채색·2008  명상에 빠진 듯 견고한 자세로 서있는 염소와 절제된 색감 그리고 섬세한 묘사력 탓에 몽환적이면서도 깊은 사유의 상태가 느껴진다.

 

【서울=뉴시스】

회화가 갖고 있는 힘 중에는 형상의 힘이 있다. 사물의 구체적인 형상을 통해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하는 것을 말한다. 이럴 경우 사물의 성질이나 형상의 특징에다 연상할 수 있는 생각이나 이미지를 덧붙이게 된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고흐의 죽음을 예견했다고 알려진 최후의 작품 중 유명한 것으로 ‘까마귀가 나는 밀밭’이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까마귀는 보통 불길한 징조를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는 새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미술사학자들은 고흐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까마귀를 그림 속에 그려 넣은 것으로 보고 있다. 까마귀의 검은색과 음산한 울음 소리에서 죽음의 이미지를 쉽게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의 구체적인 모습을 그리지 않고도 까마귀 만으로 죽음을 표현할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형상의 힘이다.

윤여환도 회화에서 이러한 형상의 힘을 추구하고 있다. 그는 ‘염소를 그리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오래전부터 염소 만을 고집스럽게 그려 왔기 때문이다. 왜 그토록 염소에 집착하는 것일까.

“염소를 물론 좋아합니다. 그래서 한때는 염소를 기르기도 했지요. 관찰하기 위해서였어요. 저는 염소의 눈에서 신비로운 환타지를 느낍니다. 마치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듯 합니다. 사유의 모습이지요. 염소의 눈동자는 동공 가운데 일자로 떠있어요. 그래서 비현실적으로 보여요. 거기다가 노란색 동공 위에 먹으로 한일자를 써넣은 것처럼 눈동자가 떠 있어서 더욱 강한 인상을 주지요.”

동양 철학 깊은 곳에 심지를 내리고 있는 윤여환의 생각은 염소를 만나면서 뚜렷한 회화관으로 떠오른 것이다. ‘생각을 통해 이치를 깨닫는다.’

이치에 도달하기 위한 깊은 사유의 여행이 삶이라는 선비적 자세를 그림으로 구현하는 일, 그것이 윤여환이 회화에다 담고 싶은 생각인 것이다. 이러한 묵직한 주제에 꼭 들어 맞는 형상을 작가는 염소를 통해 얻은 것이다.

그러면 윤여환이 도달하고 싶어하는 이치, 그것은 무엇일까. 궁극적으로는 삶 전체를 걸고 풀어야 할 숙제일 것이다. 그래서 종교적 무게가 실려오는 육중함이 묻어난다. 그것은 생로병사의 해답일수도, 천국이라는 다른 세상일수도, 또는 우주 저 너머 인간의 논리가 미치지 않는 다른 차원일수도 있다.

이러한 무거움이 윤여환의 회화에서는 의외의 명쾌함으로 나타난다. 작가의 역량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사유득리(思惟得理)’라는 제목이 붙은 연작 중 전원의 서정미가 돋보이는 작품을 보자. 누런 색을 주조로 절제된 색감으로 처리한 그림이다. 섬세한 묘사력 탓에 깊고도 맑은 사유의 상태가 느껴진다. 하늘에는 환상적 분위기가 번져 나오는 뭉게구름이 뭉글뭉글 피어 오르고 있다. 명상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염소는 견고한 자세로 서 있고, 그 뒤로 농가의 풍경이 언뜻 비친다. 이때 화면 오른쪽에 갈매기로 보이는 새 한 마리가 느닷없이 등장한다. 그 모습이 하도 명료해서 그림 오른쪽 바깥에서부터 방금 들어온 것처럼 보일 정도다.

이 그림 전체에서 느껴지는 것은 명상 속에 빠진 또렷하면서도 몽환적인 정신 상태의 분위기다. 명상을 경험하지 않고는 도달할 수 없는 그런 느낌일 것이다. 염소의 모습은 풀리지 않는 삶의 숙제에 매달려 깊은 사유에 들어간 작가 자신일 것이다. 그 너머에 보이는 서정적인 농가 풍경은 그림자 같은 현실을 빗대고 있다. 그래서 희미하게 처리한 것이다.

이 그림에서 가장 명료하게 그려진 새는 무엇을 말하는가. 작가는 ‘하늘의 메시지를 전하는 메신저’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하늘의 메시지는 어떤 것일까. 그것은 우리 모두가 사는 동안 깨달아야 하는 진리일 것이다. 사는 모습이 다른 만큼 도달하는 진리도 다를 것이다. 그 모두가 인간 개개인의 몫이니까. 그리고 하늘이나 초월자의 메시지도 각자의 마음 속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까.

윤여환은 이 그림에서 하늘의 메시지보다는 그것에 다가서는 우리의 마음 자리를 다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은 것일 게다.

더욱 경쾌하면서 명료한 분위기가 도드라지는 또 다른 그림을 보자.

푸른 하늘과 솜사탕처럼 흘러가는 흰구름이 밝은 기운을 북돋워주는 그림이다. 염소와 새의 치밀한 묘사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더욱 또렷하게 보인다. 마치 사진으로 인쇄된 동물도감을 펼친 그런 느낌까지 든다. 이 그림에서는 염소의 신비로운 눈이 유난히 돋보인다. 작가가 강조하고 싶은 사유의 분위기가 한껏 살아난 작품으로 보인다.

윤여환은 이런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독특한 표현 방법을 개발했다고 한다. 가는 붓으로 염소의 털을 일일이 그리는 것인데, 수없이 많은 선을 여러 번 반복하기 때문에 엄청난 노동이 뒤따르는 방법이다. 이는 염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속 털까지 그리는 셈이다. 이처럼 무모해 보이는 공력 덕분에 윤여환의 그림은 극사실적이면서도 깊이 있는 화면을 연출할 수 있는 것이다.

가을 깊숙이에서 만난 윤여환의 그림은 우리에게 깊고도 맑은 생각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전준엽(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