默.示.讚.歌
- 순수 조형감각과 신비적 로고스와의 만남 -

 

  

  

  

  

 

 

1

神은 과연 존재하는가.

인간은 때때로 신의 가호를 희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신의 존재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다. 철학은 그 시초에서부터 신을 여러가지로 논하고 신에 대하여 사색해 왔다. 어느 철학자는 신의 존재를 증명해 보려고 노력했고, 또 어떤이는 그 존재 증명은 성립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는가하면, 신의 존재를 부인한 哲人도 있었다. 

 

 

 

 

2

나는 근자에 와서 종교적 관조, 즉 묵상중에 절대자와의 묵시적 교감을 통한 신비체험을 하게 되었고, 나의 이성적, 합리적인 지식과 일상적인 감각세계, 내면의식을 완전히 뒤바꿔 놓기 시작했다. 깊은 내면적 세계에 침잠하여 초자연적, 초감각적인 실존을 느끼고 그것과 일체화됨을 느꼈다.

그 체험은 나에게 새로운 영감을 불러 일으키게 하였고, 절대자를 찬미하는 모종의 글을 쓰게 하였으며, 그것은 자동에 의한 速筆의 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어느날 나는 어떤 작품제작에 들어갔을 때 어느틈에 그 글씨들이 나의 작품속에 잠식해 들어 왔음을 깨닫게 되었다. 사실 글자나 문자는 어떤 뜻을 전달하는데 그 목적이 있기때문에 그것을 용도를 바꿔 작품상에 조형적으로 풀어나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로 인해 나의 그림은 완성이 안되고 망쳐버리는 결과가 자주 일어났다. 결국 그 의도에 내가 따라주기로 결정했다.

그 후부터는 글자의 조형성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고 그림의 소재도 자유로워졌다. 이제는 그 심령(心靈) 글씨가 나의 조형적 회화세계를 점유하여 나의 조형적 사고와 神的 문자조형이 혼연일체가 되어 표출되고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것은 작위와 무작위와의 신비적 합일로 나타났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현상과 본질, 순수 조형감각과 신비적 로고스와의 만남이었다. 나의 경험적 미의식과 초월적 미의식과의 융화였다.

동양미학인 시서화 삼절(三絶)의 知的 미의식을 즐겼던 옛 문인화가들의 작품처럼 나의 그림은 창조주가 만들어낸 생명있는 어떤 형태나 형상들에 대한 자연적 찬미와 신앙적 찬미 즉, 영서(靈書)를 통한 聖詩가 한데 어우러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작품제작에 앞서 계획하거나 下圖작업이 없이 순간순간 영감에 따라 마음이 가는대로 그려나간다. 잘 그려 보겠다는 과욕과 의도된 구성이 오히려 그림을 부자연스럽게 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것 같아 가급적 편안한 마음으로 화법이나 형식은 물론 재료적인 문제까지도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완전한 그림의 자유를 실현해 보고자  자유분방한 표현의 세계를 찾고 있다.

이를테면 붓이 내 손에 의해 놀아나는것이 아니라 붓이나 먹, 물감, 종이나 천 등 여러가지 재료가 가지고 있는 물성에 따라 그 성질을 최대한 살려주는  탈감각, 무작위적 자유가 바로그것이다.

거기에 나의 의도된 생각을 절제하고, 절대자의 신비에 맡긴 상태에서 자유를 찾고 참그림을 그려보고 싶은 것이다. 

그리하여 주제와 부제의 구분이나 정해진 혀식을 염두에 두지 않고 神人合一의 순간을 만나며 때로는 영서가 화면에 다채롭게, 다각적으로 다양한 형태로 분명히 드러나기도 하고 섞이기도 하며 때로는 지워지기도 한다.

 

 

 

 

3

나의 일련의 작업에 도입된 글자들은 하느님에 대한 찬미, 감사, 참회, 비탄, 예언, 교훈, 찬양, 찬가 등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세상의 언어나 글은 아무리 명료하게 보이는 말이나 개념도 그 모두가 적용의 범위에 있어서는 꼭 어느 한계가 있는 법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세상에 존재하는 글이나 문장이 아니기 때문에 말이 가지고 있는 한계성을 초월해 있다.

우리는 대체로 언어나 기호를 빌지 않고서는 일상적으로 의사를 전달할 수 없으나 일상체험 조차도 언어와 논리에 젖은 습관에 의해 상당히 왜곡된다는 데에  바로 의사전달에 따른 인간의 딜레마가 있다. 언어라는 편리한 도구는 우리가 생각하는 사물들의 의미를 앞질러 단정짓게 만들며 사물들을 우리의 논리적 선입견과 언어공식에 맞추려 들게끔 만든다.

일반적인 언어나 글은 자기의 생각과 감정을 완벽하게 설명하기 어려우나 심령언어와 글, 靈歌는 그 점을 해결해 준다.

그것이 언어의 한계성과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 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이 우리를 대신해서 하느님께 신비한 일을 말하는 것이기때문에 아무도 알아듣거나 해득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말 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하느님 자신을 위해 조배(朝拜)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묵시적, 교훈적, 예언적 의미일 경우에는 해석이 따른다.

 

 

 

 

 

 

4

나의 이번 작품들은 순수 미적 공감대로서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개인적인 신비체험이 보편화된 인식 속에 자리잡을 수 없기 때문에 보편적 공감대를 형성시키기엔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화가는 어떤 의미에서 자신의 내면세계, 영적 세계를 통한 영감에 의해 보다 가치있는 작품을 창조한다.

이 영감작용은 어떤 초인적인 힘에 의해 스스로의 의지와 사고를 떠나 거의 무의식적인  열중에 빠지게 하고 때때로 어떤 광기와 황홀한 상태에서 창작에 임하게도 한다. 이것은 단순히 기발한 착상이나 무의미한 열광과는 구별된다.

그것은 기독교적 성향이든, 불교적이든 도교나 禪的 명상에 의한 것이든, 무속적이거나 민화적 발상이든, 자연주의적이거나 자기 순수 미의식에 의한 것이든, 내면 깊은 곳에 있는 무의식적 어떤 형상을 자기 생각과 감각으로 그려내게 하여 객관적 가치를 실현하게 한다. 그러한 형상들은 은유와 상징적 의미로 처리되기도 하지만 전혀 다른 대상을 통해 나타나기도 하여 사실적, 서정적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최근 나의 일련의 <묵시찬가>시리즈에서 순수 조형 공간 속에 자리잡은 영서 공간도 성스러운 묵시적 언어 공간으로 현존하여 객관적 가치로 가늠될 수 있었으면 한다.

1992년 10월 28일

素石軒에서 尹汝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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