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인가. 나는 가끔 나 자신이 도대체 누구이고 무엇인지에 대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풀길 없는 해답을 기다리면서 허무감에 빠질 때가 있다. 조용히 마음 한가운데로 들어가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내면적 무의식의 형태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조각들을 하나하나 수습하여 어떤 살아있는 형태로 맞추기를 하는 것이 그림이 아니겠는가.

동양회화는 작가 자신이 존재의 근원을 찾아 동양적 미의식과 禪적 명상이나 노장자의 도가사상, 기운생동사상 등 동양적 사유의 세계를 선과 면과 색과 형태로 묘출시키는 것이다.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하는, 존재 자체에 대한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물음을 던지고 이에 대한 해법을  찾아 감성적 형태로 조형해 내는 것이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은 그 자체 안에 운동의 원리를 가진 것이라고 정의 하였다. 

자연은 造化되는 힘이다. 자연은 스스로 조화를 향해 움직이는데 그 움직임 자체를 氣라고 하였다. 동양에서는 일찍부터 자연의 움직임을 氣로써 풀어나갔다.

동양화의 핵심은 곧 기의 생성을 화폭에 담는 것이다. 오늘날 고대 도교가 현대물리학과 만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존재의 영원함이 얼마나 신묘한가를 새삼 깨닫게 되기도 한다.

그림은 하나의 움직임, 기, 하나의 생명을 화폭에 불어 넣는 것이다. 형상의 움직임, 생명적 현상과 형상의 생명력, 무형의 움직임을 표출시키는 것이다.

유형의 기를, 감성적 동력과 자유로운 물성의 운용을 통해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을 그려내는 것, 자연의 진미를 찾아내는 것이다.

화폭에 기를 불어 넣는 것 그것은 사람을 감동시키고 그림 곁에 붙들어 놓는 힘을 가진 것이다.

그림은 편안한 감동을 주는 것이요, 그림은 내면적 의사표현이다. 

좋은 그림, 내가 만족하고 남이 공감하는, 시대의 징표를 상징하는, 사회의식을 변화시키는, 감성적 변화를 가져오는 그런 그림을 그리고 싶다.

 

 


 


 

 

 

運七技三 즉,인생사는 무상하여 成事 敗事간에 노력이 차지하는 비율은 3이요 나머지 7은 운수가 차지한다는 전통 운명론을 운칠기삼이라 한다. 

청나라 포송령(蒲松齡) 이란 유명한 작가가 있다. 과거시험에 여남은 번이나 떨어져 인생의 쓴 맛을 만끽한 때문인지 그의 작품집인 요재지이(僥齋志異 )에 운칠기삼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한 선비가 과거공부를 하는데 흰 수염이 나도록 번번이 낙방하여 가산이 기울고 아내는 아이를 둘러업고 가출해 버렸다. 죽을 작정을 하고 대들보에 동앗줄을 매어놓고 생각하니 자기보다 못한 자들이 번번이 급제한 것이 억울하여 죽을 수가 없었다. 

이에 옥황상제에게 가서 따져보기로 했다. 옥황상제는 정의의 신과 운명의 신을 불러 술시합을 시켜놓고 서생에게 말했다.

"정의의 신이 더 많이 마시면 네가 분개한 것이 옳고 운명의 신이 더 많이 마시면 네가 체념하는 것이 옳다"했다. 

이 술시합에서 운명의 신은 일곱 잔을 마시고 정의의 신은 석 잔 밖에 마시지 못했다. 옥황상제는 말했다. 

"세상은 정의대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불합리한 운명의 장난이라는 것이 꼭 따르는 법이다. 세상이 7푼의 불합리가 지배하고 있긴 하나 3푼의 이치가 행해지고 있음도 또한 명심해야 한다. "

 

 


 

 

이 지구상엔 여러 가지 생물들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 각각의 다양한 생물체를 생명체로써 특징지워 주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들은 결국 하나의 세포가 단위가 되어 생명체의 생명현상을 영위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포를 구성하고 있는 기본요소들은 99%가 수소, 탄소, 질소, 산소 등의 10여가지 원소들이다.

이와같이 오늘날 과학자들은 세포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그 구성성분은 거의 다 밝혀내고 있지만 그 구성성분 각각에는 생명이 없다. 어찌보면 생명체란 무생명체의 집합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생명체를 구성하고 있는 각 성분을 시험관내에서 합성한다하더라도 결코 생명체를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세포의 크기와 모양은 다양하지만 물질의 구성요소인 탄소, 수소, 산소, 질소 등의 크기는 이미 정해져 있다.

유전자의 집합체인 생체분자(DNA)를 보면 생체는 세포로 되어 있고 그 속에는 핵, 미토콘드리아 등 세포 소기관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면 세포기관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일까. 물질은 분자로, 분자는 원자로, 원자는 원자핵과 전자로, 원자핵은 중성자와 양성자로, 이것들은 또한 소립자로 되어 있다.

천연에 존재하는 92종의 화학원소 중 27종만이 각종 생명체에 필수적인 것이며 이중 가장 풍부하게 존재하는 4원소, 즉 수소, 산소, 탄소, 질소가 세포중량의 99% 이상을 차지한다.

세포를 구성하는 생체분자의 가장 주된 것은 단백질, 핵산, 다당류 및 지질과 같은 크기가 매우 큰 소위 거대 분자들이다. 이중에서도 단백질은 , 세포 내에 매우 풍부하게 존재하는 거대분자로서 가장 중요하다. 모든 생물 중에 들어 있는 단백질은 그의 기능이나 종류에 관계없이 기본적인 20종류의 표준 아미노산으로 만들어져 있다. 즉 아미노산은 단백질을 구성하는 기본요소라고 할 수 있다.

단백질의 구조는 크게 4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먼저 1차 구조는 아미노산의 배열순서를 말한다.

예를 들면 사람의 헤모글로빈은 574개의 아미노산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배열순서가 사람이면 누구나 같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지구상엔 천만종이 넘는 생물이 존재하고 각 생물 중에는 수천가지 단백질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한 種이 천 가지를 갖고 있다고 할 때 결국 각기 그 배열순서가 다른 1백억 가지의 단백질이 존재한다는 사실인데 과연 20가지의 아미노산만으로 그만한 숫자의 단백질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지금도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이끌려 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그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찾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찾아 가는가? 

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하나임을, 
그리고 靈과 肉이 하나임을 느끼며 살고 있다.

그러나 나의 의지대로, 나의 계획대로 되는 일보다는 어떤 알 수 없는 움직임, 그 힘에 의해 나의 시간과 노동력이 제공되고 있음을 더 많이 느낀다.

이것이 사회를 움직이는 힘, 역사를 창조해 가는 힘, 바로 자연의 힘이 아니겠는가. 
그 힘을 동양에서는 자연이라 했고
그것을 서양에서는 야훼, 즉 하느님이라 했다.

운칠기삼의 비율은 어쩌면 나의 의지와 계획대로 살아가는 삶의 무게가 3이요, 타의 힘, 조화되려는 사회구성원의 힘의 무게가 7이 아닌가 한다.

세상은 정의를 향해 가고 있지만 꼭 정의가 승리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도 실감한다. 
세상은 정의보다 강자의 논리에 지배되고 그것이 세상을 이끌고 있지 않은가. 
약자는 강자를 위해서 존재해야 하고 항상 외로운 투쟁과 피해와 희생만 해야 되는가.
그러나 치열한 투쟁과 승리는 발전과 존재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것은 냉엄한 자연의 이치일 뿐이다.
그래서 어느 철학자는 '투쟁은 곧 정의다'라고 했던가.

1999년 11월 素石軒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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