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여환의 변증법적인 조형전개 -

미술평론가 / 박용숙
 

윤여환처럼 확실하게 자기명증성의 체험을 가진 화가를 만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사실 화가가 된다는 것은 어떤 형태이든 명증성을 획득하는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니체는 바위에서 문득 데몬을 봄으로써 진리에 대한 명증성을 얻었으며 미켈란젤로는 바위속에서 그가 찾는 이미지를 발견함으로써 미의 명증성을 얻었다.

바위와 데몬, 바위와 이미지는 서로 교환이 불가능할 만큼 다른 뜻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으나, 그보다도 중요한 것은 양쪽이 다같이 바위에서 무언가 이상한 것을 보았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바위는 무생물의 고체 덩어리이며 물리적으로는 단순한 질량에 불과하다.
따라서 무생명의 물체에서 데몬(이미지)을 본다는 것은 돌에서 귀신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혼란이고 놀라움의 체험이다.
우리가 달리의 그림을 보면서 이 두가지 감정을 동시에 갖게 되는 것도 같은 이야기가 되지만 유의해야 할 점은 이 혼란과 놀라움이 창조의 원동력이고 시발점이 된다는 사실이다.
모든 창조신화가 최초에 혼돈이 있었다고 말하고 그 혼돈에서 새 질서가 나타났다고 한 점을 상상해 보면, 혼돈의 정체가 어떤 경우이든 예술가에게는 불요불가결한 경험적인 대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도대체 혼돈이란 무엇일까? 혼돈은 무질서를 가리키는 것일까?
혼돈이 단순히 무질서라면 그 무질서에서 어떻게 새질서가 나타나게 되는가. 그것은 분명히 모순개념이다.
니체가 이를 데몬이라고 말했던 것은 바로 진실의 실체인 자연의 이치가 실은 모순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니까 예술은 '모순'을 다루는 것이며 위대한 예술가는 이 모순이라는 불합리속에서 무엇인가 놀라운 것을 꺼내 보이는 사람들이다.
윤여환은 이 모순의 의미를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

 

"모든 삼라만상은 조화로서 이루어진다.
생명은 곧 조화를 뜻한다.
모든 생체는 스스로 조화되려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반면에 변화를 좋아하는 본능도 있다.
질서는 안식을 주지만 곧 건조해져서 무료함, 권태로움을 낳고
그 지리함에 지쳐 그 틀에서 뛰쳐 나온다.
그 틀이 부서진다. 변모한다. 파괴와 개혁이 온다.
부조화는 파멸과 죽음, 소멸을 뜻한다. 거듭난다. 재생된다.
죽음으로써 다시 태어난다. 버림으로써 다시 소유한다.
새질서와 새생명, 새로운 창조가 시작된다."

그는 조화와 파괴를 같은 시각으로 바라보며 그 모순의 자각이 창조의 원동력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깨닫고 있다.

윤여환은 초기의 전통적인 화법의 동물화를 버리고 갑자기 추상양식의 <묵시찬가>시리즈로 전환하였다.
양식적으로 보면 이 변화는 구상양식에서부터 추상양식의 전환으로 이해되지만, 중요한 것은 왜를 묻는 것이며, 이 왜는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데 결정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만일 그의 구상양식의 동물화를 돌에다 비유한다면 그의 추상양식의 <묵시찬가>는 데몬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을 좀더 실감있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조형상으로 제기되는 문제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 스스로가 염소그림이라고 말하는 그의 동물화에서는 서양화와는 그리는 방식이 다르지만 그러나 물체와 공간이 다르게 이해된다는 점은 같다.
이를테면 그의 그림에서 염소는 들판에 놓여지는 존재이다.
그것은 바위가 땅위에 놓여있는 것과 같으며 물리적으로는 중력을 지닌 질량이 공간에 존재하는 모습과 같다.
이것은 우리가 존재에 대한 아무런 반성없이 살고 있는 일상성의 경험에서는 당연한 시각이다.
왜냐하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실감과 마찬가지로 염소도 확실하게 공간속에 존재하며 그 항시적인 존재는 염소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특수한 존재다.
어쩌면 윤여환에게 있어서 그것은 조화이고 생명이고 질서의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윤여환은 조화와 질서뒤에는 변화가 있고 파멸이 있다고 그는 믿는다.
따라서 그 모순의 시각은 염소를 부정한다.
염소는 그 나름의 중력이나 질량을 항시적으로 지닐 수는 없다.
염소에 갇힌 질량은 흩어져서 시공속으로 사라져야 하므로 그것은 버림로써 소유하고 소유함으로써 버려야 하는 창조의 원리를 따라야 한다.
소유는 질량이나 중력으로 표현되고 버림은 공간과 시간으로 표현된다.
그러니까 <묵시찬가>는 존재의 질량이나 중력을 파괴하는 일에서 시작되고 있다.
이 말은 대상과 배경(공간)이 둘이 아니면서 둘이라는 논리를 이끌어낸다.
따라서 어떤 사물도 어떤 곳에 놓여져서는 안된다.
이것은 마치 꿈과 같은 세계에서만이 경험하는 초현실적인 비젼인 것이다.
윤여환은 이 점을 이렇게 토로한다.

 

"내가 지금 잡으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유를 끊는다. 사유를 넘어 직관으로 간다.
논리적 사유는 이해 할 수 없는 수수께끼만 낳는다.
자신의 자아는 죽어야만 한다.
완전히 죽는 자는 완전히 살아 날 것이요, 반만 죽는 자는 반만 살아 날 것이다.

사유를 끊고 자아를 죽임으로써 그는 되살아 난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그의 염소를 들판에서 몰아내어 '혼돈'이라는 이름의 공간속에 몰아넣고 휘젓는다.
염소와 들판은 갈기갈기 찢기어 무중력의 회오리 속에서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간다.
이렇게해서 그의 추상양식의 <묵시찬가>가 탄생했다.
그러니까 그의 혼돈은 묵시이고 그 묵시는 재생이고 환생을 암시하는 것이다.

<묵시찬가>시리즈에서는 수묵이 상당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데 그것은 마치 입체파의 분석적인 그림자처럼, 중력을 상실하는 질량의 극적인 요인을 묵시하기도 한다.
그 검은 마력속으로 꽃, 사람의 얼굴, 물고기, 사슴의 머리, 식물 등 온갖 형태들이 마치 블랙홀 속으로 휘말리어 사라지는 것처럼 뒤엉켜 있다.
그것이 사물의 과거속으로 역행하는 모습이라는 것은 미지의 문자가 새겨진 파편들이 작품속에 널려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이성의 승리라고 말해지는 오늘의 문명시대에 아직도 미해독의 문자가 있다는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윤여환은 그 의미를 묵시적인 세계와 연결시키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성적인 것, 합리적인 것에 해독되지 못하는 과거는 결국 미개이거나 그 이상의 것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무수하게 발굴되는 미지의 문자세계는 결코 미개가 아니다.
미해독은 미개가 아니라 삼차원을 넘는 것이다.

그러나 윤여환은 최근에 이르러 <묵시찬가>와는 또 다른 면을 보여주는 <사색의 여행>시리즈를 발표하고 있다.
그는 새로운 시리즈를 발표하면서 그가 시도했던 <묵시찬가>의 세계가 종교적인 열정에도 불구하고 조형적으로는 '방임'이라고 반성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종교적 열정과 조형적 방임은 결국 나를 자유롭게 하질 못하여, 버려둔 염소를 다시 찾는, 즉 본연의 자아를 찾는 작업에 들어가게 되었다.
93년 여름부터 시작한 염소회화작업인 <사색의 여행>이 그것이다."

<묵시찬가>가 중력(삶의 무게)이나 질량을 제거하는 작업이라면 <사색의 여행>은 다시 그것들을 재결합하는 작업이다.
자아를 버렸다가 다시 잃어버린 자아를 회복하는 일은 삶의 무게(실감)를 되찾는 일이지만, 윤여환에게 있어서 그것은 결코 동어반복적으로 제자리에 되돌아 오게됨을 뜻하지는 않는다.물론 <사색의 여행>에는 다시 염소가 완결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 염소는 결코 그의 동물화에 나타나는 염소와는 다르다.
동물화에서는 염소는 들판에 놓여진다.
그러나 <사색의 여행>에서는 염소가 놓여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들과 더불어 있는 것이다.
그것이 부정과 긍정을 통해 도달한 윤여환의 조형세계이다.
나는 이렇게 획득한 윤여환의 조형세계가 앞으로 어떻게 진전될 것인지 매우 주목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