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적 사실과 주관적 체험 그리고 관조의 미학-

미술평론가 김상철

 

작가에 있어서 작업의 변화와 변모는 필연적인 것이고 자연스런 일이지만 윤여환의 경우는 유독 그변화의 양태가 두드러지고 뚜렷한 특징을 갖는다.
일반적으로 작가의 작업이 변화하거나 그 표현의 양상이 변모하는 경우라도 어느정도 일정한 조형적 줄기를 근간으로 하여 변화하는 것이 상례이지만 윤여환의 경우는 개별적인 체험과 사색의 결과들을 독립된 조형으로 드러내는 특이한 면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윤여환의 작업은 크게 세가지로 구분하여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세가지는 일정한 패턴을 지닌 정형속에서 이루어진것이라고 하기보다는 특정한 사안과 사유에 대한 독립립적이고 개별적인 반응의 결과이다.

주지하듯이 윤여환의 초기작업은 동물화이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작가로서의 윤여환에 대한 일차적인 인상을 각인시키는 당시의 동물화들은 그만큼 인상적인 것이었던 동시에 돋보이는 것이었다. 새삼 공모전에서의 빼어난 성적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대상에 대한 몰입과 집착, 그리고 이의 성실한 표현 등은 진지함 그자체였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일견 소재주의적 경향이 나타나는 바가 없지 않지만 당시의 작업들은 작가의 화면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와 작업에 임하는 바탕을 이룬 중요한 것이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염소와 소 같은 일상적인 소재를 통한 작가의 기능적 발휘와 화면의 경영은 아카데믹한 채색화의 한 전형을 보여 주는 것으로 독특한 서정적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사색하는 듯한 동물들의 자태와 이의 효과적인 포착, 표현등은 작가와 소재와의 관계가 단순한 조형과 피조형의 대립적인 관계가 아니라 일정부분 대상에 대한 몰입한 지경에서 이루어지는 교감을 바탕으로 화면이 구성되고 있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이 부분은 작가의 이후 작업과도 연계되어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즉, 작가가 대상으로 채택한 동물들은 비록 그것이 자연주의적인 유년시절의 기억과 추억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여도 이미 객관적 사실의 피조형물이기보다는 작가의 특정한 부분을 대변하는 표식과도 같은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로서의 윤여환을 기억하는 이들이 그의 작업을 떠 올릴때 바로 이러한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것은 작품에서의 특징적인 면에서 기인하는 바도 있지만 이와같은 작가의 대상에 대한 몰입과 합치에서 연유되는 부분도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섬세하고 치밀한 화면 경영의 묘를 보여주던 작가의 심미세계는 돌연 획기적인 변화를 나타내고 있다.
지난 1992년에 <묵시찬가 >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일련의 작업들은 작가에 대한 상투적인 이해와 인식을 바꾸어 놓을 만한 획기적인 것이었으며 동시에 새로운 조형에의 시작이기도 하였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의 작업들은 작가 개인의 개별적인 신앙 체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실험적 조형들로 마치 고대의 상형문자, 혹은 부호를 연상시키는 추상적인 작업들이다. 이전의 동물화들이 치밀한 준비작업과 반복적인 기능적 발휘를 바탕으로 하여 구축된 것이라면 <묵시찬가 >시리즈의 작업들은 도발적이고 즉흥적이며, 형이상학적인 내용들로 점철된 또하나의 전혀 새로운 조형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수묵과 채색의 세계를 넘나들며 격정적인 필촉의 구사와 분방한 화면의 경영은 마치 격랑과도 같은 에네르기를 동반한 표현주의적 경향이 짙은 것이라 정의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이는 순수한 작가의 신앙체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른바 "신은 있는가 "라는 원초적인 물음에 대한 작가의 반응에 다름아니다.
 

"나의 일련의 작품에 도입된 글자들은 하느님에 대한 찬미, 감사, 참회, 비탄,   예언, 교훈, 찬양, 찬가 등의 의미를 내포하고있다. "

라는 작가의 고백과 같이 화면에 도입된 부호들은 이미 단순한 조형적 기호이기 이전에 특정한 내용을 바탕으로 존재하는 무의식적 행위의 산물인 것이다.
일견 자동기술의 방법론을 연상시키는 작가의 화면에 대한 해석은 개별적인것, 그것도 종교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전개된 것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객관화의 대상이 되기는 어려운 것이다. 이른바 직관과 영감에 의한 작가의 < 묵시찬가 >는 작가의 개별적 체험을 여하히 구체화, 혹은 객과화시키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몇가지 실험적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이는 <묵시찬가>라는 일련의 작업을 통하여 작가가 일관되게 고민하고 추구한 것이기도 하다. 비정형의 부호, 혹은 사물들을 드러내는 화면에는 조형적 배려와 객관화의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한 작위적인 조형들과 장치들이 내포되어 있다. 장미, 나비, 꽃, 새와 같은 여러가지 사물들과 보색적인 관계에 있는 색채의 구사, 그리고 그들을 종합적으로 조화시키는 먹색의 도입등은 모두 작가의 개별적인 체험이 단순히 개인적인 행위 혹은 개별적인 발산으로 경도됨에 대한 염려를 통해 마련된 객관화를 위한 장치이자 배려인 셈이다.

사실 <묵시찬가>시리즈의 작품들은 그것이 비록 객관화라는 부차적인 문제를 안고 있기는 하지만 작가에 있어서는 상대적으로 자유스러운 공간을 제공해 주었다는 데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른바 객관적 사실의 재현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로운 조형의 구가는 그것의 바탕이 종교적인 신비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제한적 설명이전에 전혀 새로운 조형적 체험이었음은 자명한 일인 것이다.

윤여환의 작업은 이제 또다른 한 획을 그으며 전개된다. 그것은 바로 < 사색의 여행 >으로 명명되어진 새로운 조형적 기행이다. 이 일련의 작업들은 마치 이전의 첫번째 작업과 두 번째로 나타나던 <묵시찬가>에서의 이미지를 조합해 놓은 듯한 복합적인 이미지의 화면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작가의 사색은 염소라는 서정적 대상을 매개로 하여 시공과 인식의 한계를 넘는 초월적인 사색의 세계를 전개하고 있는것이다.
이미 객관적 의미로서의 염소라는 의미보다는 일정부분 의인화되거나, 혹은 인간이라는 제한적이고 한계적인 입장마저도 초월한 듯한 깨달은 자의 모습을 형상화한듯한 염소의 눈을 통하여 사물에 대한 관조의 시선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사색은 자연적 서정주의에서 절대 존재에 대한 인식과 체험을 거쳐 이제 이러한 개개의 내용들을 초월하는, 마치 제삼자의 입장과도 같은 관조의 미학을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작가의 관조미학은 형상으로부터의 제약이나 조형에 대한 부담감보다는 초자연적인 것, 혹은 초시공적인 것에 대한 형이상학적 사유에 다름아니다. 인간이라는 인식과 이해의 주체마저도 이미 염소화해 버린 작가가 관조하는 세계는 미치 앉은채로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린다는 이른바 좌망의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마음을 가지런히 하여 나를 잊고, 나를 잊음으로 하여 보다 나다운 것에 접근할 수 있다는 도가적 미학의 연계점을 찾을 수도 있는 이러한 작가의 의지는 바로 자유에 대한 희구이자 열망이라 할 수 있다.

형상과 조형의 속박, 그리고 재료와 장르에 대한 부담감의 극복, 나아가서는 일반적인 인식과 이해의 범위까지도 초월하는 작가의 심미기행은 보다 광범위한 사변과 사색을 바탕으로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는 것이다. 객관적인 사실에서 직관과 영감의 신비체험으로, 그리고 또다시 관조의 미학으로 이어지는 작가의 심미기행은 자못 진지하고 흥미로운 것이다. 마치 형상의 속박에서 벗어나 보다 근원적인 기에 접근해 가는 작가의 작업은 그만큼 많은 가능성의 소재이기도 한 것 이라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