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의 초상 / 가로112cm, 세로177cm / 천+수묵+아크릴 / 1991


이 작품은 부드러운 천위에 큰 붓으로 먹의 침윤함을 마음껏 즐겨본 수묵화인데 먹선 안쪽에 있는 색은 아크릴칼라로 여러색을 뿌려 밀도감을 낸 것으로,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가톨릭에 귀의하면서 마음속에 자리잡은 절대자에 대한 표상이 그려지곤 했는데 그 <익명의 초상> 연작 중의 하나입니다. 말하자면 십자고상의 고난의 예수상이기도 하고, 고난을 이겨내는 참는 자의 모습이기도 하고, 또는 한국인의 상징처럼 된 돌하루방 일 수도 있겠고, 난국을 극복하는 어떤 통치자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은 1991년도에 그려진 것인데 그러니까 85년도 제1회 개인전이후부터 90년도까지 저의 작업은 완전 '수묵추상회화'로 경향이 바뀌었습니다. 그것은 첫번째로 환경적인 큰 변화를 가져온 때문인데 86년 마산 창원대학교에서 대전에 있는 현재의 충남대학교로 제 직장의 근무지를 옮기면서 작품경향이 급변하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사실 그 5년 간의 제 작업은 거의 휴면상태 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회적으로나 교육적으로나 제 인생에 있어 가장 어려운 시기를 마치 숙명처럼, 형극의 가시밭길을 밟고 가지 않으면 않될, 피할수 없는 정해진 운명이라고나 할까, 불안과 공포와 인생에 대한 회의 속에 심신이 곤고하여 슬럼프에 빠진 상태보다도 더 나쁜, 바이오리듬이 최하위에 머물러 있어 작품이 거의 나오질 않았던 시기였습니다. 건강이 점차 회복되고 정신이 들기 시작하면서 종교를 갖게 되고 또다시 새로운 작업이 시작되었는데 그것이 이른바 <익명의 초상>과 <묵시찬가>연작들입니다. 고통의 신비를 그렇게 표현하고 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