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소傳神論|조각글 모음

  

  

염소:

포유류 우제목(偶蹄目) 소과(牛科)의 동물.

염소는 순우리말로서 한자로는 山羊이라고 한다. 가축인 염소류와 야생종인 염소류, 즉 들염소, 마코르, 투르, 아이벡스, 등을 포함한다. 양과 아주 비슷하며 구별하기 어려우나 다음과 같은 점에서 양과 다르다.

염소의 수컷에는 턱수염이 있고 양에서 볼 수 있는 안하선, 서혜선, 제간선들은 없다.

그러나 염소의 무리에는 꼬리의 기부 하면에 고약한 냄새를 분비하는 선(腺)이 있다.사지와 목은 짧고 코끝에는 털이 있다. 뿔의 단면은 삼각형 또는 호리병박 모양이며, 뿔의 앞면에는 혹처럼 생긴 것이 있거나 주름이 많이 져 있다.

뿔은 소용돌이 모양 또는 나사선 모양으로 비틀린다. 뿔은 암수 모두에 있는 것과 아주 없는 것이 있다. 가축인 염소무리는 몸무게가 수컷 60~90kg, 암컷 45~60kg이고, 야생인 염소무리는 어깨높이가 1m 정도이다. 체모는 양과 같이 부드러우나 양모상은 아니다.

體色은 갈색. 회갈색에 검은 반문이 있는 것, 갈색. 흑색. 백색 등 여러 가지이다.

험준한 산에서 사는데 적응하며, 먹이는 나뭇잎, 싹, 풀 등 식물질이고, 사육하에서도 조식(粗食)에 견딘다. 임신기간은 145~160일이며, 한배에 한 두 마리를 낳는다. 갓 태어난 새끼는 털이 나 있고 눈을 떴으며, 생후 얼마 지나면 걸을 수가 있다.

생후 3~4개월이면 번식이 가능하다. 수명은 10~14년이다. 품종은 유용종, 육용종, 모용종으로 나눈다. 한국 재래종은 육용종인데 고려 충선왕때 중국에서 수입한 것이 한국 재래 산양의 선조이며, 몸집이 작고 털빛깔은 검은 것이 보통이나, 간혹 흰색. 갈색 등 여러 빛깔이 나타난다. 암.수 모두 뿔이 있으며, 체질이 강건하고 병에 대한 저항성이 강하다. 특히 고기 맛이 좋아서 일반에게 널리 이용되고 있으며 한방에서는 보신제로 쓰이기도 한다.

몸무게는 암컷이 25~30kg, 수컷이 30~40kg으로 작은 편이며, 사료의 이용성이 높아 아무 풀이나 나뭇잎을 잘 먹는다.

  

 

우리 민족은 양과 염소를 잘 구별하지 않는다. 염소의 수컷에는 턱수염이 있다. 수염이라는 것은 나이 많은 할아버지에게만 있는 것이고, 염소의 성격이 또한 온화하고 온순하여 옛날이야기나 동화 속에서 염소는 주로 인심 좋은 할아버지로 묘사된다.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양이 늑대, 호랑이에게 쫓기고 잡아먹히는 대상이 대거나, 이들 동물과 대조를 이루어 착한 동물로 이야기된다.

양에 대한 한국인의 이미지는 순하고 어질고 착하며 참을성 있는 동물, 무릎을 꿇고 젖을 먹는 은혜를 아는 동물로 수렴된다.
양하면 곧 평화를 연상하듯 성격이 순박하고 온화하여 좀처럼 싸우는 일이 없다. 양은 무리를 지어 군집 생활을 하면서도 동료간의 우위 다툼이나 암컷을 독차지하려는 욕심도 갖지 않는다. 또한 반드시 가던 길로 되돌아오는 고지식한 습성도 있다.

성격이 부드러워서 좀처럼 싸우는 일이 없으나 일단 성이 나면 참지 못하는 다혈질이기도 하다. 목양(牧羊)이 깊이 토착화되지 못한 우리 나라에서는 양과 관련된 이야기는 별로 없다.

우리 나라에서는 삼한(三韓)시대에 양을 식용으로 썼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고, 일본의《日本書紀》에 기록에 보면 "법왕(法王) 1년(599년) 7월에 백제에서 낙타 한마리, 나귀 한마리, 양 두마리, 흰꿩 한마리를, 헌덕왕(憲德王) 12년(820년)에는 신라에서 검은 수양 두마리, 흰양 네마리, 산양 두마리, 거위 한 마리를 보냈다"는 내용이 있다. 이들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 나라에 흔하지 않던 양이 삼한 시대부터 국가간 외교에서 중요한 공물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새해 들어 첫 양날을 상미일(上未日)이라고 한다. 첫 양날에 특기할 만한 민속은 찾기 힘드나 전라남도 지방에서는 양이 방정맞고 경솔하여 해안 지방에서는 이날 출항을 삼가는 곳도 있다. 경거망동하면 바다에 나가 해난을 만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제주도에서는 '미불복약(未不服藥)'이라 하여 환자라도 약을 먹지 않는다. 이날은 약을 먹어도 효과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일을 제외하고는 양은 온순한 짐승이기 때문에 이날 무슨 일을 해도 해가 없다고 한다. 우리가 정월에 하는 윷놀이의 도개걸윷모에서 도는 돼지, 개는 개, 걸이 바로 양에 해당한다.

천성이 약한 탓에(착한 탓에) 해로움을 끼칠 줄도 모르면서 오직 쫓기고 희생되어야 하는 양은 설화, 꿈, 속담 등에서도 언제나 유순하고 인내심이 강하고 상서로운 동물로 통한다.

이성계가 초야에 묻혀 지내던 시절에 양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양을 잡으려 하자 뿔과 꼬리가 몽땅 떨어져 놀라 꿈을 깨었다. 이 꿈 이야기를 무학대사(無學大師)를 찾아가 이야기를 했더니 대사는 곧 임금에 등극하리라는 해몽을 했다. 즉 한자의 '羊'에서 양의 뿔에 해당하는 '丷'획과 양의 꼬리에 해당하는 곤 '丨'획을 떼고 나면 "王"자만 남게 되어 곧 임금이 되는 것이다. 그 이후 이태조(李太祖)가 조선을 건국하매 양꿈은 길몽으로 해석되었다. 지금까지도 양꿈에 대한 해몽은 희생, 제물, 종교인, 선량한 사람 등으로 해석한다. 이런 연유는 목축 민족에게는 양이 재산의 척도가 되고, 제단에 바치는 희생물이었고 양의 성품이 티없이 온순해 착한 사람으로 의미하게 되고, 기독교 문화에서는 성서에 나오는 양과 관련하여 종교인의 상징이 된다.

양은 언제나 희생의 상징이었다. 양의 가장 큰 상징적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속죄양(贖罪羊) 일 것이다. 성격이 순박하여 양하면 평화를 연상한다. 겁먹은 듯한 순한 눈망울과 복슬복슬한 털에 덮인 양떼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평화와 안락의 상징으로 충분하다.

양은 또한 정직과 정의의 상징이었다. 양은 반드시 가던 길로 되돌아오는 고지식한 정직성이 있다. 우리 속담에 '양띠는 부자가 못된다'라는 말이 있다. 양띠 사람은 양처럼 너무 정직하고 정의로워서 부정을 못보고, 너무 맑아서 부자가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유교 : 음력 봄 2월과 가을 8월의 첫 丁日에 문묘에서 공자에게 지내는 제사인 석전대제에서 조(俎;도마) 위에 담는 희생으로 양머리[羊腥]를 사용한다. 양머리는 유교의 대표적인 희생물이다. 동양에서 양은 일찍부터 영험스러운 동물[靈獸]로 알려졌다. 소, 돼지와 함께 제물로 쓰여왔고 고기의 맛이나 질도 그만큼 좋은 상위권의 동물이었다.

고대 동양에서는 소는 소의 솥[牛鼎], 돼지는 돼지의 솥[豕鼎], 양은 양의 솥[羊鼎]에 각각 삶아서 제물(희생)로 썼으며, 각 솥은 독특한 장식이 있었다. 양을 중히 여기는 생각은 세월에 따라 聖獸의 경지로까지 끌어 올렸으며 먹고 버린 뼈까지 인간의 길흉화복을 예시하는 영물로 간주되었고 고이고이 간직하기도 했다.양의 가죽 옷은 제후나 대부 등 높은 신분에 있는 사람만 입을 수 있는데 논어의 이른바 염소 가죽옷에 검은 관을 썼다는 '羔裳玄冠'이 바로 그것이다. 무릎을 꿇고 젖을 먹는 은혜를 아는 동물로, 늙은 아비양에게 젖을 빨리며 노후를 봉양하는 양의 모습에서 효를 상징하기도 한다.

상형 문자인 양(羊)이 생기게 되자, 羊은 인간의 모든 기쁨을 포괄하는 글자가 되어 '좋은 것' 또는 '상서로운 것'을 나타내게 되었다.

양의 생김새에서 딴 상형 문자인 양(羊)은 맛있음, 아름다움[美], 상서로움[祥], 착함[善] 등의 의미로 이어진다. 즉 큰양[大羊]이란 두 글자가 붙어서 아름답다는 뜻의 미(美)자가 되고, 나[我]의 좋은 점[羊]이 옳을 의[義] 자가 된다. 양이란 상형문자에서도 착하고[善], 의롭고[義], 아름다움[美]을 상징하는 동물로 양을 인식했던 것이다.

'크게 좋고 상서롭다'는 것을 요즘처럼 '大吉祥'이라 쓰지 않고 '大吉羊'이라 썼으며, '모든 상서롭지 못한 것을 물리친다'는 뜻의 '壁除不祥'을 '壁除不羊'으로 썼던 기록이 《博古圖漢十二辰鑑》이나 《漢元嘉刀銘》 등에 남아 있다.

양은 서양의 정신사에서 가장 상징적인 동물이다. 초원 위에 흰 구름의 형상을 수놓으며 몰려가는 양떼의 풍경은 가장 서양적인 전원의 목가를 낳았고, 서구의 기독교 문명을 받쳐 온 성경에서 양이야기는 무려 500번 이상이나 인용된다. 고대 이스라엘인의 생활에서 양은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제의(祭儀)의 필수품이었고, 양의 머릿수가 곧 재산을 뜻했다. 또한 양고기는 귀한 손님에게 대접하는 최고의 음식이었다.

하느님의 어린양인 예수가 탄생한 베들레헴의 마굿간을 들에서 양치던 목자들이 동방박사들에게 인도했다는 것도 양의 상징적 기능을 말해 준다. 또한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된 뒤 이스라엘이나 서양에서 양을 제물로 삼는 번제(燔祭)가 없어진 것은 예수와 양이 동일시된 성서의 유산이다.

이처럼 기독교 문화에서 양은 선량한 사람이나 성직자를 상징해 왔으며, 일상생활에서 소나 말에 못지 않은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일찍이 고대의 수메르인이나 이집트인들을 비롯 그리스, 로마, 게르만 민족도 양을 신의 신성수(神聖獸)로 생각했으며, 유목민족에게 양은 특히 뇌우(雷雨)의 신이 가장 좋아하는 제사용 동물로 여겨졌다. 고대 로마에서는 양은 미래를 점치는 동물로 활용했다.

따라서 서양인들은 양을 가리켜 인간의 이로움을 위해 희생하고자 태어난 동물로서 높은 경지의 도덕성과 생생한 진실을 상징한다고 보고 있다.

오늘날 우리 일상생활에서 양피(羊皮)는 고급 피혁으로 장갑, 구두, 잠바, 책표지 등에 쓰이고 양모(羊毛)는 보온력이 높고 질겨 고급 양복지, 솜 대용으로 두루 쓰이는 모직물의 주원료가 된다. 양유(羊乳)는 우유에 비해 단백질, 지방, 회분이 풍부해 허약 체질인 사람에게 좋다. 이처럼 양은 털, 고기, 뼈 등 어느 것 하나 버리지 않고 일상생활에 이용되는 유익한 동물이다.

회화에서는 공민왕(恭愍王)의 {二羊}과 작자 미상의 {山羊} 그림이 있고 도자기로는 원주 법천리고분서 출토된 '靑瓷羊' 등이 있다. 우리의 옛 조각이나 그림에서 양을 그린 작품은 드물다. 그러나 일단 우리 앞에 나타난 양의 모습은 위기를 만나도 당황하지 않은 여유와 멋을 느끼게 하는 평화와 정의의 상징으로 묘사되고 있다.                                    -
천진기(국립민속박물관)

  

  

 

 

 

 

 

 

 

 

 

 

 

 

 

 

 

 

 

 

 

 

 

 

 

 

 

 

 

 

 

 

Aesop(B.C 6C초반-564)Fables

염소지기와 야생 염소
어떤 염소지기가 풀밭으로 염소들을 데리고 가다 보니 자기 염소들 사이에 야생 염소 몇 마리가 섞여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저녁이 되자 염소지기는 그 염소들을 모두 우리 속에 몰아 넣었다.
그 다음 날에는 마침 거센 폭풍이 몰아닥쳐 여느 때처럼 염소들을 그냥 우리 속에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그는 원래 데리고 있던 염소들에게는 굶어 죽지 않을 만큼 적은 양의 먹이를 주고 새로 온 야생 염소들에게는 충분한 양의 먹이를 주었다. 그 염소들도 잘 길을 들여서 키워 볼 생각이었던 것이다.
 폭풍우가 지나가자 염소지기는 다시 염소들을 풀밭으로 데리고 갔다. 그런데 산자락에 도착하자마자 야생 염소들은 재빨리 도망쳐 버렸다. 염소지기는 그 뒤를 쫓아가면서 그렇게 정성껏 보살펴 주었는데 은혜도 모르고 이럴 수 있느냐고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염소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가 떠나는 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어요. 신참에 불과한 우리를 원래 있던 염소들보다 더 극진히 대해 주었으니 그것은 다른 염소들이 새로 오게 될 경우 우리를 또 그처럼 내팽개칠 수도 있다는 뜻이잖아요." 

염소와 관련된 이솝우화 보기

 

평소 작업하면서 떠오는 생각들, 때로는 문득 스쳐지나가는 생각들, 그리고 내 작업과 관련되는 글들을 조각 조각 모았습니다.

 

염소라고 하는 대상이 나의 열정과, 공감하는 이해를 통해 여과되고 투영되는 세계를 그리고 싶다.

염소의 감동이 나를 통해 다시 새로운 감동을 줄 수 없을까.

나의 일관된 생각들 그리고 불안정한, 불안전한 생각들, 이들 불협화음을 조화시킬 수 있는 것이 그림이 아닌가.
 

 

 

 

작품제작에 있어서의 가장 중요한 일은 내 작품 속으로 감상자를 끌어들여 오래 머물게 하는 일이다.

작품에 있어서의 선과 점은 사물의 본질에 귀착하면서 신선한 형상미를 준다.

나의 염소작업은 먹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과 염소라는 형태가 가지는 하나의 메스를 이루는 선, 선을 통한 생명력을 추구하는 것이다.

즉 선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어떤 형태를 차용할 수가 있는데 염소라는 독특한 형태를 찾아 선을 도입시키므로써 그곳에서 살아있는 선을 찾는다.

염소라는 형태를 통해서 선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선의 생명력을 찾아내는 것이다.

염소라는 형태를 감싸고 있는 선의 감각적 반복의 질서를 통해 진정한 회화적 본질을 획득, 독창적인 주제와 이미지를 구축하여 개별적 고유성과 어떤 담론을 이끌어내려고 한다.

  

  

  

 

중국의 晋시대 <韓非子>에 보면 식객 가운데 제왕을 위하여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있었다. 제왕이 "무엇을 그리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인가?" 라고 묻자 "개나 말 같은 동물을 그리는 것이 가장 어렵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무엇을 그리는 것이 가장 쉬운가?"라고 묻자 "귀신이나 도깨비를 그리는 것이 가장 쉽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대개 개나 말 같은 동물은 사람들이 익숙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꼭 닮게 그려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려내기 어렵다고 한 것이다.

 

 

 

 

본시 동양화에는 서양의 재현과 표출의 개념에서처럼, 사실과 전신(傳神 )의 조형방식으로 나뉘어진다. 즉, 전신과 형사(形似 ), 사의(寫意 )와 사실의 개념으로 나눌 수 있다.

전신론이란 본래 대상에 대한 사실적 묘사보다도 天氣, 또는 형사를 뛰어넘는 신운(神韻)을 더 중요시하는 입장으로, 말하자면 형사론 내지 사실론과 대립되는 미학을 견지하는 화론이다.

東晋의 화가겸 이론가인 고개지(顧愷之: 344~405)는 불변의 예술적 가치 개념으로 傳神寫照論을 제시하여 동양화의 사실정신은 외형적인 사실뿐만 아니라 내면적인 정신까지 그려내는데 있음을 주장하였다.

이처럼 화가는 정확한 사실에 기초를 두어야 하지만 그림의 참 가치는 형사(形似)에 머물러서는 안되며 모름지기 신운을 담아내야 한다는 고개지의 이론인 전신사조론은 곧 以形寫神論 으로 요약되기도 했다.

고개지의 전신론은 뒤이어 남제때의 사혁(謝赫:500~535년경 활동)의 기운생동론으로 발전하는데 사혁은 옛 화가 중 27인의 화가를 모델로 예술적 품격을 6가지 등급으로 나눠 평가하는 <고화품록>을 저술하였다. 그것이 이른바 사혁의 畵六法이다.

그는 최하위 등급부터
1)배껴 그리는 수준,
2)구도를 잡을 줄 아는 수준,
3)채색을 제대로 할 줄 아는 수준,
4)형태를 제대로 잡을 줄 아는 수준,
5)필법을 능숙하게 구사할 줄 아는 수준,
6)기운생동하게 그려낼 줄 아는 수준으로
등급을 나누어 비평하였다.

서양미학에서는 보통 5단계에서 그칠 것이나 동양미학에서는 기운생동이라는 한 단계를 더 설정하여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은 이론은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 후기에 여러 비평가들에 의해  새롭게 재조명되었는데 당시의 화론가 남태응(南泰膺:1687~1740)은 그의<청죽화사>에서 "윤두서는 사생에 기초하여 정확하게 그려냄으로써 화풍을 일신하였으나 그는 인공의 공교로움을 다했을뿐 천기를 발현하지는 못했다.그러나치밀함을 더하여 정교하게 풀어내고 교묘히 깨달은 것이 완벽한 경지에까지 나아간 것은 正道를 따른 王道"라고 평 했다.

그러나 윤두서에 의해 조선후기의 사실정신은 기계적인 사실론이 아니라 전신론과 사의론까지 포용하는 융통성있는 사실론으로 발전시켰다.

전신론과 사실론은 성리학의 性情論과 理氣論 과도 연결해서 생각 할 수 있다.

정통성리학의 입장에서 사물의 존재를 인식하는 이기론과 성정론을 회화에 대입하여 예술의 천기론과 성정론을 주장하는 예술철학적 인식이 있었다.

그 어느 경우든 사실보다는 관념이 우세하여 전신론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데, 실제로 당시의 화풍 또한 그러한 관념성을 짙게 풍기고 있었다.

우리는 전신론과 형사론이 이형사신의 견지에서 조화를 이루지 못할 때 양자가 극단으로 치달아 병폐를 낳고 마는 것을 동양회화사에서 수없이 많이 보아왔다.

예를들어 김정희가 조선후기 화원들이 매너리즘에 빠져 사의적 가치를 잃어 갔을때 문자향과 서권기를 강조했던 것은 너무도 유명하다.
 

 

 

 

 

 

나는 염소라고하는 단일소재를 가지고 20 여년을 줄곧 매달려 온 셈이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다보니 나를 아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나를 염소화가라고 부르고 있다.

모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염소의 생태학적인 분석을 해봐도 염소라고 하는 소재는 단지 동물일 뿐이다. 
문제는 그 대상을 어떻게 주관적으로 표출시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달려있다. 
작가마다 염소를 보고 생각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린시절 들과 언덕, 산모퉁이에서 흔히 만나는 평화로운 염소의 모습 그것은 지극히 일반적인 시골의 정경을 연상케 하는, 포근한 고향의 상징적 요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보다도 나는 염소를 통해 내 삶의 여정을, 삶의 성찰과 고백을, 아니 동양의 氣韻精神을 담아내는 도구로 차용해 온 것 같다.

나는 염소의 이미지를 빌려서 인간의 내면 속에 흐르는 본원적 심성을 그려내기도 하였다.

나는 염소그림에서 존재의 불변성과 순수무구성, 진실성을 찾는다. 이것의 발견은 보다 근원적이고 시원적인 것, 궁극적으로 영원에 대한 동경과 희구이다.

작품창작에 있어서의 철학적 접근은 사회에서 한 화가로서의 역할을 인식하는 방법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내가 그림으로부터 얻어내야 하는 것은 경이감 즉 우리 자신을 초월한 것 그리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삶을 누리고 있는 현실을 진솔하게 짚어 가는 것이라고 하겠다.

작품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보유하는 경험들을 함께 농축시켜 주고 그것을 형태화 하여 그곳에서 의미를 찾아주기도 한다.

우리 모두는 내적인 조화의 필요성을 지니고 있으며 조화를 다시 창조하는 조화의 구조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기본적으로 미술은 우리의 삶을 긍정해 주기 때문이다.

나의 염소그림은 공간에서 침묵으로 맴돈다. 그림창작에 관한 나의 노력은 힘찬 공백, 의미심장한 것, 활성화하는 것 그리고 절대적인 것을 지향하고 있다.

나는 가능한 한 강렬한 그림제작, 불확실한 현실과 영원한 변천 사이의 긴박성을 담아내고, 통합된 하나의 현실과 근본적으로 정적인 것과의 사이에서도 절박한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방향으로 가려고 한다.

나의 염소그림은 공간 및 구성에 명확성을 부여한다.  현존에 대한 재구성과 새로운 감성의 세계를 찾아내는 통합적 성격의 그림이다.

2000년 2월 素石軒에서 

尹汝煥